지난달 25일 저녁 7시 30분 무렵, 싱가포르 창이공항 터미널4 면세구역.

창이공항은 항공 전문 컨설팅 기업 스카이트랙스가 뽑은 올해 세계 최고 공항(World’s best Airport)이다. 한밤 중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늦은 저녁이었지만, 터미널4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창이공항은 코로나19 이후 최근까지 이 터미널4를 폐쇄했다. 고작 9개월 전인 지난해 9월에야 운영을 재개했다.

이 터미널은 우리나라 국적기 대한항공를 중심으로 제주항공, 에어아시아, 젯스타 같은 저비용항공사(LCC)가 사용한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폐쇄했던 기억이 무색할 만큼 터미널4에는 활기가 넘쳤다. 영어와 중국어를 정신없이 번갈아 사용하는 공항 직원들과 예비 탑승객들로 각 카운터가 빼곡하게 찼다.

순식간에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 구역으로 들어서자 한층 재밌는 광경이 펼쳐졌다. 왼쪽에는 롯데면세점의 휘황찬란한 주류 매장이, 오른쪽에는 신라면세점 화장품 매장이 나타났다. 두 면세점은 마치 이마를 대고 노려보듯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구역별로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 잡은 우리나라 공항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창이공항은 매년 전 세계 공항 평가에서 1위를 도맡아 할 정도로 이름난 공항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면세 체인들이 총성 없는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테크나비오는 전 세계 면세 시장 규모가 2026년까지 매년 9%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가운데 44%는 아시아-퍼시픽(APAC) 지역이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

창이공항은 현재 APAC 지역을 잇는 가장 크고 효율적인 공항이다. 창이공항그룹(CAG)에 따르면 지난달 첫 주 기준 창이공항은 95개 항공사, 5500편이 넘는 항공편이 정기운항하는 아시아 최대 허브다.

마이스(MICE, 기업회의·포상관광·컨벤션·전시회) 전문 기업 트레이드이벤트솔루션스의 데니스 스티븐스 대표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지리적으로 싱가포르는 세로로는 중국과 오세아니아 사이에 끼여 있고, 가로로는 중동과 미국 사이에 놓여있다”며 “홍콩이 코로나와 정치적인 이유로 아시아 허브에서 탈락하면서, 인프라가 다른 국가에 월등히 앞서는 싱가포르가 치고 나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래픽=손민균

싱가포르는 중동과 중국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히 이들이 거쳐가는 면세점 비즈니스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다. 올해 아시아·태평양 세계면세박람회(TFWA) 역시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창이공항에는 한국 롯데면세점·신라면세점과 듀프리(스위스), DFS(미국), 라가데르(프랑스) 등 세계 굴지 면세점 5곳이 둥지를 틀고 있다. 코로나19 이전 기준 창이공항 여객 수는 연간 7000만명 수준이다. 면세점을 포함한 상업시설 매출을 전부 합치면 연 2조원을 웃돈다.

창이공항은 현재 탑승객 모두에게 20싱가포르달러(약 1만8000원)짜리 쿠폰을 공항 명의로 증정하고 있다. 면세 쇼핑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이날 면세 구역을 지켜보니 창이공항에 들어온 5개 글로벌 면세 체인 가운데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은 유독 이 프로모션에 면세점 자체 추가 할인까지 해주면서 할인행사에 열성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터미널4 주요 면세매장에는 쇼핑을 하려는 탑승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롯데면세점이 운영하는 주류매장에는 글렌리벳·맥캘란·글렌피딕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가 즐비했다. 이들 위스키를 사기 위해 탑승객들이 길게 늘어서면서 계산하는 데는 10분이 넘게 소모됐다.

신라면세점이 운영하는 화장품 매장 역시 에스티로더 같은 고가 화장품을 사려는 남녀 탑승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창이공항그룹에 따르면 창이공항 입·출국장 상업시설 매출 가운데 절반 정도는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 몫이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창이공항 상업시설 매출은 28억6000만싱가포르달러(약 2조4500억원)를 기록했다. 이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6000억원은 신라면세점이 달성했다.

그래픽=손민균

롯데면세점은 DFS가 40년간 갖고 있던 주류·담배 면세사업권을 2019년 말 낙찰받았다. 이후 팬데믹이 끝난 올해 상반기 공항 상업시설 영업 재개 이후 코로나19 이전 DFS와 비슷한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DFS는 당시 주류·담배 판매로 연 5000억원 정도 매출을 기록했다.

세계면세점협회 컨퍼런스 발표 자료를 보면 창이공항 면세점 사업이 퀀텀점프하는 포인트는 중국 단체 관광이 언제 정상화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중국 단체 관광객이 창이공항을 허브로 이용하기 시작하면 롯데면세점과 신라면세점 매출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두 면세점은 이미 여러 인지도 높은 브랜드와 손잡고 창이공항 면세점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신라면세점은 이달부터 다음달 8일까지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과 창이공항 터미널1에서 뷰티 팝업스토어(임시매장)를 운영하고 있다.

신라면세점은 ‘샤넬의 여름(Un Été de Chanel)’이라는 주제로 팝업스토어를 열고 기초 화장품부터 색조 화장품, 향수에 이르기까지 샤넬 대표 제품을 두루 준비했다.

신라면세점 관계자는 “레 조 드 샤넬(Les Eaux De Chanel) 향수 콜렉션은 전 세계 면세점 가운데 이번에 처음 공개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며 “2월에 크리스찬 디올과 협력해 준비한 팝업스토어에 대한 반응이 좋아 이번 팝업스토어를 이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