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를 떠나서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요. 통임대는 아예 문의가 들어오지 않아 시세를 말하기도 어렵네요.” (신사동 A 공인중개사 사장)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신사역 8번 출구 인근에서 현대고등학교까지 약 700m 길이의 도로에 늘어선 가로수길 상가들은 절반가량이 비어 있었다.
이곳의 명물이던 카페 커피스미스는 2021년 7월 이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문이 닫혀 있었고, 헬스앤뷰티(H&B) 스토어 롭스가 있던 건물은 ‘폐업처분’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화장품 좌판이 벌어졌다.
스페인 인디텍스 그룹이 운영하는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 자라도 지난달 31일부로 3층 규모의 매장을 닫았다. 이 회사는 앞서 가로수길에서 운영하던 자라 홈과 마시모두띠의 매장도 철수했다.
엔데믹(풍토병화)과 마스크 해제 등으로 주요 오프라인 상권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서울 강남의 대표 상권인 가로수길은 여전히 회복이 더딘 모습이다.
부동산 자문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발간한 ‘2022년 4분기 리테일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가로수길의 공실률은 31.5%로 3분기(29.5%)보다 증가했다. 작년 같은 기간(36.4%)과 비교하면 공실률이 소폭 줄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한 공실률은 이보다 더 컸다. 중앙 도로에 인접한 1층 점포 중 비어 있는 매장은 총 30여 개로, 한 집 걸러 한 집이 비어있었다. 3~4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비어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문 연 곳 중에선 애플스토어만이 손님으로 북적였다.
최근 들어 H&M 그룹의 최상위 브랜드 아르켓, 니치 향수 브랜드 딥티크, 신 명품 브랜드 아미 등이 가로수길에 플래그십스토어(대표 매장)를 내며 ‘패션 성지’로서 위상을 되찾는 듯했으나, 상권을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드나드는 이들이 없어서다.
가로수길에서 40여 년간 공인중개업을 해온 심문보 동방컨설팅 대표는 “7~8년 전 불어 닥친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의 후폭풍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맞물리며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개성 있는 패션 매장과 카페가 띄운 가로수길에 들어오려는 대기업들이 건물 임대료를 500~1000% 올려놓으며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됐고, 이후 코로나19로 매출의 60%를 차지하던 외국인 관광객이 줄면서 상권의 매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 가로수길에 매장을 낸 한 대기업은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도, 매장을 접고 수년간 임대료만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 대표는 “한 달에 2000만~3000만원 하던 임대료가 갑자기 2억~3억원까지 치솟으니 작은 브랜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며 “지금은 전성기 때보다 임대료가 30~40%가량 내렸지만, 들어오려는 임차인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로수길의 흥망성쇠는 최근 부상한 성수동 상권과는 대조적이다. 성수동은 상권이 뜨면 뒤따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프랜차이즈 입점을 금지하고, 건물주와 임대료 안정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대기업이 유입되는 와중에도 지역 색을 지켰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가로수길은 글로벌 제조유통일괄화(SPA) 브랜드와 대기업 브랜드들이 무차별적으로 장악하면서 고유의 색을 잃었다. SPA 브랜드 중 현재 남아있는 매장은 H&M, 에잇세컨즈 정도다.
상업용 부동산 데이터 전문 기업 알스퀘어 진원창 이사는 “가로수길의 1층 매장들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한 요소가 부족하다”라며 “성수, 한남동이 패션 성지로 부상한 데다 집객 콘텐츠라 할 만한 식음(F&B) 매장도 인근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로 옮겨가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