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상품의 낙원’인 동시에 ‘새로움의 수용 공간’이라는 점에서 인간 창조성에 기반한 예술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해나갈 겁니다.”

미술사학자인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는 지난 24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11층에서 열린 ‘재현과 재연’(Seeing Beyond) 컨퍼런스에서 “이번 전시는 백화점이 한국 미술 전시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1층에 전시된 천경자 화백의 작품 '정'(靜). /이슬기 기자

70여 년 전 이중섭·김환기 화백이 작품을 선보였던 곳 역시 옛 미도파백화점(현 영플라자)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국내 상설 화랑이 자리잡기 이전 백화점 내 갤러리가 근현대 작가를 소개하는 장으로 미술 문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예술학박사인 조혜정 예술학박사 성신여대 초빙교수도 “최근 대형 백화점들이 인지도나 대중성 위주로 아트 마케팅을 펼쳐 다소 피로도가 있었다”며 “이번 전시회는 차별화한 콘텐츠와 전문성을 갖춘 컨퍼런스로 백화점의 교육적 역할과 공공성을 보여줬다”고 했다.

이날 컨퍼런스는 대중에게 오늘날의 구상 미술과 미술시장을 소개하고, 백화점과 아트 비즈니스에 대해 대담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전시회 기획자인 조은정·조혜정 교수와 김영애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실 상무, 김복기 아트인컬쳐 대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이 연사로 참여했다.

롯데백화점 '재현과 재연' 특별미술전 기획자인 미술사학자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가 24일 오후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11층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언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24일 롯데백화점 '재현과 재연' 특별전시회 컨퍼런스에 참석한 김영애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 실장,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조혜정 성신여대 초빙교수(왼쪽부터). /롯데백화점 제공

롯데백화점이 이번에 선보인 ‘구상 미술’은 현실 세계와 인간 형태를 표현하는 데 주목한 미술 분야다. 근현대 미술 및 회화와 조각 작품을 주로 포함한다. 통상 ‘추상 미술’의 대립 개념으로도 쓰인다. 재현(再現·representation) 등 특정 대상을 나타내는 모든 미술 형태를 아우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전시회는 소공동 본점, 동탄점, 인천점 갤러리에서 진행 중이다. 근대 회화 작가 41명과 현대 회화 작가 40명, 조각 작가 23명 등 총 104인의 작품 140여점으로 구성했다. 미술관에서 접하기 힘든 근대 작품을 다양하게 선보여 화제가 됐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 작가 이종우, 최초의 동경미대 입학생이자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제자 이마동, 근대 미술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박영선과 김인승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롯데백화점은 104인의 소개와 작품을 담은 270페이지 분량의 도록을 발간했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애비뉴엘 1층에 전시된 천경자 화백의 작품 '정'(靜). 관람객 기준 좌우에 각각 불가리, 까르띠에 매장이 있다. /이슬기 기자

롯데백화점 아트콘텐츠실을 이끄는 김영애 상무는 이날 천경자 화백의 ‘정’(靜)이 전시된 애비뉴엘 1층에 공간적 의미를 부여했다. ‘정’은 1955년 제7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천 화백의 초기 대표작이다.

현재 이 작품의 좌측에는 불가리, 우측에는 까르띠에 매장이 있다. 각각 뱀과 표범이 상징인 명품 브랜드다. 관능적인 뱀과 표범 사이에 ‘독사’가 자리한 격이다. 뱀은 천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다. 1952년 개인전에서 35마리의 독사가 엉켜 있는 ‘생태’를 선보이며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했다.

미술이 상업적·대중적 공간에서도 흥미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상무는 “작가나 유족으로서는 상업 공간 내 전시가 낯설 수 있다”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까지 조명하고 더 많은 이와 토론하려는 백화점의 의도를 믿고 작품을 내어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롯데백화점이 올해 3월 개최한 리조이스 전시회(위)와 5월에 연 아트 페어(아래). /롯데백화점 제공

◇더 커진 국내 미술 시장...올해 9223억 원으로 3배 ‘껑충’

이번 전시회와 컨퍼런스는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국내 미술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미술 시장 규모는 9223억 원으로 2020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유통업계 전반이 주목하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출생)가 회화와 공예품 등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면서, 대형 백화점들은 앞다퉈 전시 행사를 비롯한 아트 비즈니스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매출 1위 강남점을 리뉴얼하며 명품 브랜드 매장이 들어선 3층에 회화, 오브제, 조각 등을 전시 및 판매 중이다. 큐레이터까지 상주해 갤러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현대백화점도 전문 문화공간 ‘알트원(ALT.1)’을 조성해 누적 방문객 50만을 넘겼다.

앞서 롯데백화점은 올해 3월 롯데그룹 사회공헌 활동 리조이스(rejoice)를 주제로 한 대규모 특별 테마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40여명의 여성작가 작품을 선보이고, 수익금의 1%를 기부했다.

5월에는 시그니엘 부산 호텔에서 아트 페어를 열고, 국내외 갤러리 12곳과 30여 개의 디자인 브랜드 등 순수 미술·공예·생활 용품을 선보였다. 롯데백화점 창사 이래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VIP 티켓 500장이 개막 전 매진되는 등 업계와 지역사회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