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의 시민들이 길거리 한복판에 놓여진 베개를 밟고, 누군가는 심지어 그 위에서 쿵쿵 뛰는 영상이 2017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화제였다.

베개 두개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날계란은 시민들의 무게를 견디고도 멀쩡했다. 제작진은 그 날계란을 가져가 바로 앞에서 후라이를 했다.

블랭크코퍼레이션이 지난 2017년 일명 '마약베개'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실험카메라 형식의 동영상. / 유튜브 캡처

이 영상은 한 회사가 자체 제작한 베개의 푹신푹신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제품 기능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광고 문법을 벗어난 참신한 영상을 661만명이 봤다.

회사가 ‘마약베개’라고 이름 붙인 제품은 160만개 넘게 팔렸다. 일명 ‘SNS 대란템’의 시작이었다. 블랭크코퍼레이션(블랭크)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탁조 클리너, 퓨어썸 샤워기, 셀프 다운 펌 등을 팔아 이른바 ‘대박’을 쳤다.

회사 매출은 2017년 478억원에서 2018년 1169억원으로, 영업이익은 77억원에서 139억원으로 늘었다. 2018년 벤처투자(VC)업계에서 평가한 회사의 기업가치는 3000억원에 달했다.

4년이 지난 지금 분위기는 180도 변했다. 블랭크가 지난달 호텔롯데와 네이버(NAVER(035420)) 크림에서 신규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평가 받은 기업가치는 1000억원대다.

블랭크는 ‘미디어 커머스’를 유행시킨 기업이다. 미디어 커머스는 미디어와 커머스의 합성으로 사전적인 정의는 없다. 제품 기획부터 제조, 유통 전 과정에 걸쳐 영상 미디어 콘텐츠를 활용하는 사업모델을 통칭한다.

2016년 회사를 설립한 남대광 대표는 2011년 페이스북에 만든 ‘세상에서 가장 웃긴 동영상’ 페이지 구독자 수를 170만명으로 성장시키는 등 콘텐츠로 사람을 모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남대광 블랭크코퍼레이션 대표

그러나 이런 신선한 방식이 히트를 치면서 경쟁자들이 늘었다. 페이스북이 5분 이내의 자극적인 제품 광고 영상으로 도배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각질 제거기의 기능을 보여준다며 발바닥 각질이 잔뜩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디어 커머스 업체들이 핵심 광고 채널로 활용했던 페이스북 이용자 수가 줄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점점 더 짧고 군더더기 없는 컨텐츠를 찾아 인스타그램과 틱톡으로 이동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미디어 커머스 자체는 여전히 유망하지만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 수준이 올라갔다고 입을 모은다.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 같은 시간을 얼마나 의미있게 보냈는지를 의미)를 중시하는 요즘 소비자들은 단순 제품 판매를 위한 자극적 영상과 공 들인 콘텐츠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에 유통업체들은 콘텐츠 전문 제작사와 협업한 영상을 내놓고 있다. BGF리테일(282330)의 CU는 콘텐츠 제작사와 손잡고 만든 20부작 숏폼 드라마 ‘편의점 고인물’을 공개했다. 롯데홈쇼핑은 작년 250억원을 투자한 초록뱀미디어와 공동 제작한 예능 ‘랜선뷰티’를 지난 5월부터 케이블TV에서 방영 중이다.

CU 숏폼 드라마 편의점 고인물 포스터./ BGF리테일 제공

국내 한 이커머스의 콘텐츠 담당 임원은 “블랭크의 경우 훅(hook·갈고리,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 한방)이 있는 광고 소재로 클릭을 유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넘어선 콘텐츠를 제작하는 건 잘 안된 것 같다”며 “브랜드 가치를 살려주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는 여전히 수요가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를 핵심 경쟁력으로 삼는 스타트업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팡이나 SSG닷컴처럼 전국적인 물류 인프라를 제공할 순 없지만 입점 브랜드를 대신해 당장 광고로 써도 될 정도의 고퀄리티 콘텐츠를 제작해 판매자와 소비자 만족도를 동시에 높이는 전략이다.

식품 커머스 컨비니는 황태, 견과류, 군고구마 말랭이 등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이나 상품의 촉감, 식감 등 특징을 소비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1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상세페이지에 노출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제품 생산자와의 인터뷰를 짧은 다큐 형식으로 만들어 올린다.

RXC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프리즘은 5성급 호텔 내부에서 직접 라이브방송을 진행해 20~30대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타사 대비 영상이 고화질이고 광고 못지 않게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4월부터 조선팰리스, 워커힐 등 8개 국내 호텔과 협업해 라이브방송을 한 결과 매출 20억원을 기록했다.

프리즘(PRIZM)의 조선펠리스,그랜드조선제주,워커힐 판매 라이브방송 캡처. / RXC 제공

미디어 커머스의 필승 전략이 바뀌면서 블랭크는 사업 방향을 다시 짜고 있다. 작년 말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지적재산권(IP) 커머스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팬덤이 확실한 디즈니 캐릭터와 관련한 제품을 기획, 제조, 유통할 계획이다.

새로운 주주가 된 호텔롯데와도 롯데월드의 캐릭터 로티, 로리 IP를 활용한 협업에 나설 전망이다.

회사 관계자는 “성장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블랭크의 새로운 사업방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전략적 투자자들에 한해, 현재시점에서 기업가치를 조정하더라도 투자를 유치하기로 했다”며 “글로벌 D2C(생산자 직접판매) 커머스 사업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