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구 동명동에 위치한 카페 '시리즈 인트로'. /김은영 기자

지난 2일 오후 광주 동구 동명동에 위치한 카페 ‘시리즈 인트로’는 평일 오후에도 빈자리 없이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낡은 시멘트벽과 복고풍 철제 의자 등 서울 성수동이나 을지로에서 볼 법한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야외 테라스 자리에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인증족(族)들의 셔터음이 연신 들렸다.

‘노잼도시(재미 없는 도시)’ 광주에도 힙(Hip·멋진)한 상권이 있다. 카페 거리가 형성된 동구 동명동 고급 주택가와 기독교 마을이자 예술 거리로 유명한 남구 양림동이 대표적이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골목상권으로, 광주 지역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골목 살리는 지역 크리에이터들

고급 주택들이 모여있는 동명동은 특색 있는 카페들이 몰린 ‘카페 거리’다. 1990년대 부촌(富村)으로 불리던 동명동은 인근에 있던 옛 전남도청이 이전하며 구도심 주택가로 활기를 잃었다가, 2015년 아시아문화전당(ACC) 개관과 맞물려 핫플레이스가 됐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모여 상권이 형성됐는데, 평일에만 유동 인구가 6000~7000명에 달한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10년 후 그라운드'. /10년 후 그라운드 홈페이지

호남 선교의 거점인 기독교 마을 양림동도 주목받는 동네다. 1900년대 초 이곳에 터를 잡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일찍이 커피 문화가 도입돼 광주 호남 지역의 커피 문화를 발전시켰다. 벽화와 정크아트 작품(폐기물로 만든 작품)들이 전시된 펭귄마을도 관광지로 인기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유명한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동명동-충장동-양림동으로 이어지는 광주의 골목상권은 수도권을 포함하고 봐도 최상위급 골목”이라고 평가했다.

골목을 지탱하는 이들은 지역(로컬) 크리에이터들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지역성과 결합한 자신만의 콘텐츠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콘텐츠와 공간을 융합한 새로운 콘텐츠를 지역에서 개척하고 발전시킨다.

양림동의 경우 2020년 설립된 복합문화공간 ‘10년 후 그라운드’가 앵커스토어 역할을 하고 있다. 1975년 개원한 유치원 터를 개조해 만든 문화 공간으로, 교육, 커뮤니티, 출판, 식음 서비스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광주 동명동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의 메뉴. 현지 식자재로 맛과 멋을 살렸다. /조선DB

동명동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은 프렌치 코스 요리로 유명한 맛집이다. 2013년 이곳에 식당을 낸 공다현 셰프는 담양 우성목장의 칡소 등 지역의 식자재를 사용해 프랑스 요리를 만드는데, 수도권 못지않은 양식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주한프랑스대사관이 선정한 한국의 프렌치 레스토랑 20곳 중 하나로도 선정됐다.

광주 유일의 수제맥주 양주장인 ‘무등산 브루어리’도 동명동에서 탄생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윤현석 컬처네트워크 대표가 광주 지역의 밀로 맥주를 만든다. 5·18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지은 ‘평화 페일에일’, 무등산 수박으로 만든 ‘워메 IPA’ 등 지역 특성을 담은 명칭이 눈길을 끈다.

동명동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카페 ‘플로리다’는 카페 컵홀더에 전라도 말을 새긴다. 50년 넘는 한옥을 개조해 지역 예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예술공간의 집’, 와인과 식료품 등을 파는 편집숍 ‘퍼블릭 마켓’도 동명동을 대표하는 명소로 꼽힌다.

◇하드웨어 대신 로컬 브랜드 육성에 투자해야

사람들이 백화점이나 온라인 쇼핑몰 대신 골목을 찾는 이유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때문이다. MZ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는 골목상권에서 경험·감성·문화를 소비한다. 매끈한 건물보다 오래된 골목길의 낡은 주택에서 매력을 느끼고, 나의 취향과 유사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광주 동구 동명동에서 탄생한 수제맥주 양조장 무등산 브루어리. /무등산 브루어리 페이스북

모 교수는 “광주가 원도심 상권을 잘 관리하면, 로컬 브랜드와 독립 브랜드가 강한 도시가 될 수 있다”라며 “동네, 로컬, 소상공인이 강한 도시가 광주가 지양해야 하는 문화도시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경리단길처럼 뜨는 골목상권을 ‘~리단길’이라 부르듯, 이들도 동리단길, 양리단길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하지만 전국의 ‘~리단길’이 그렇듯 이곳 골목도 흥망성쇄를 뒤따르는 중이다.

동명동의 경우 최근 ‘무등산 브루어리’와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운영하던 ‘희재가’, 빵집 ‘아티장홍’, 게스트하우스 ‘신시와’ 등 동네를 만든 원조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현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골목이 상업화되면서 초기의 색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광주 동구 동명동에 위치한 식료품 편집숍 '퍼블릭 마켓' 내부. 와인과 식료품 등을 엄선해 판매한다. /김은영 기자

윤현석 컬처네트워크 대표는 “홍대와 경리단길이 그랬듯 동명동도 과도기에 진입했다”라며 “골목이 관광지화되고 건물 임대료가 오르면서 독립책방 등이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고 했다.

‘무등산 브루어리’ 운영과 함께 지역 소상공인들의 창업을 돕고 있는 그는 최근 양조장을 목포로 이전했다.

4~5년 사이 동명동의 임대료는 5~6배가량 증가했다. 현지 사업자들은 임대료 상승의 원인 중 하나로 공공기관의 지역 개발 사업을 꼽는다.

양림동과 동명동의 경우 현재까지 총 330억원가량의 공공자금이 투자됐는데, 이 중 90%가 도로 정비 등 하드웨어에 쓰이면서 건물 임대료를 올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윤 대표는 “도로만 깔면 된다는 발상은 새마을 운동 시대의 사고”라며 “골목 상권을 지속해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의 상품이나 콘텐츠를 육성해 로컬 브랜드를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