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게 ‘회사원’은 더 이상 한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고리타분한 직업이 아니다. 자기주도학습을 넘어 자기주도근무를 해나가는 회사원들, 회사 이름으로만 대표되는 것이 아닌 ‘내가 기획하고 내가 키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회사도 잘 되고 내 능력도 발휘하는 MZ세대 직장인들의 업무 세태를 MZ세대 기자들이 파헤쳐 본다. [편집자주]
청담, 한남, 안국 등 서울 주요 매장에서 ‘도넛 오픈런(매장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 구매하는 현상)’을 일으킨 인기 디저트 브랜드 ‘노티드’를 우유, 젤리, 맥주로 만든 편의점 GS25의 협업 상품이 유통업계에서 화제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조합에 20~30대 고객이 열광하며 6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이 360만개에 달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60만개, 하루에 2만개 꼴로 팔린 셈이다.
노티드 우유는 출시 초기 서울우유 커피·딸기·초코를 제치고 가공유(흰 우유 제외) 부문 판매량 2위를 차지한 데 이어 부동의 1위 이자 ‘뚱뚱한 바나나우유(뚱바)’로 불리는 빙그레 바나나우유의 왕좌를 넘보기도 했다.
이 제품을 기획한 건 GS리테일(007070)의 갓생기획팀이다. 갓생이란 신(god)을 뜻하는 갓에 인생을 합한 신조어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단어에 훌륭하다는 의미를 붙이고 싶을 때 앞에 갓을 쓴다. 갓생은 훌륭한 인생이라는 뜻으로 하루를 알차고 부지런하게 살았다는 느낌이 들 때 쓴다.
갓생기획팀은 작년 6월 생겼다. 특징은 20~30대 직원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 회사 측은 갓생기획팀에 한 가지를 주문했다. “요즘 트렌드에 맞춰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상품을 출시하라.”
갓생기획팀은 주 1회 한 시간, 모든 업무에서 배제된 채 수다를 떤다. 이 수다 겸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그동안 50여 종의 제품이 출시됐고, 누적 판매량은 800만개가 넘는다. 기대 이상의 성과 덕분에 6개월 간의 단기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갓생기획팀은 곧 2기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비즈는 이달 23일 서울 강남구 GS리테일 본사에서 갓생기획팀 팀원 3명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내 유일한 카피라이터 직군인 선우정 매니저(30), 유튜브 채널을 총괄하는 이은진 매니저(28), 홍보와 인싸(인사이더) 역할을 맡은 홍보팀 이용희 매니저(33)가 한 자리에 모였다.
최고 히트상품인 노티드 시리즈는 갓생기획팀의 제안으로 협업이 성사된 뒤 제품 출시까지 석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팀은 3개월 동안 100여 개 넘는 샘플을 만들고, 기존 노티드 브랜드 도넛 제품과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제품군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결과 도넛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우유를 선정했고, 소비자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는 맥주, 젤리도 만들기로 했다.
맛에 있어서도 기존 우유와 차별화 하려고 했다. 수없이 새로운 맛의 우유를 만들어보고 마셨다. 이런 노력 끝에 라즈베리맛 우유가 탄생했다. 라즈베리맛은 노티드 우유 세 가지 맛(바닐라 밀크, 바나나 밀크, 라즈베리 딸기 밀크) 중 MZ세대에게 가장 잘 팔렸다.
또 다른 인기 상품인 다운타우너 감자칩은 서울 한남 등지에 매장을 둔 수제버거 브랜드 다운타우너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다운타우너는 아보카도 버거와 브랜드 캐릭터를 새긴 티셔츠, 컵 등 다양한 굿즈를 판매해 20~30대 사이에서 인기다.
이 제품 아이디어를 낸 선우정 매니저는 감자칩 매니아다. 그는 “새로운 감자칩이 출시될 때마다 무조건 다 먹어보는 편”이라며 “야근 때 아보카도 버거를 먹으러 자주 찾았던 수제버거 브랜드 ‘다운타우너’ 매장의 캐릭터 굿즈는 편의점 상품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감자칩 하나를 사더라도 친구한테 귀여운 감자튀김 캐릭터가 그려진 감자칩을 선물로 줄 때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귀엽거나, 재밌거나, 맛있거나 셋 중 하나라도 포함돼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운타우너 감자칩은 그걸 다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에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기업과의 협업이 수월해지고 있다. 다소 소극적이던 브랜드에서 협업 제안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노티드, 다운타우너 모두 지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음료(F&B) 브랜드다. 갓생기획팀 직원들은 항상 유튜브, 인스타그램, 뉴스레터 등을 챙겨보며 소비자 트렌드를 파악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노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엄연한 주요 업무다.
팀원들은 사내 메신저에서 “유튜브 보니 요즘 애들이 이걸 갖고 논다더라”, “압구정 어딜 갔는데 분위기가 너무 귀엽더라”, “인스타에서 요즘 이게 핫하더라” 하면서 수다 떨듯 소통한다. 주 1회 한 시간 동안 팀 회의를 열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쏟아낸다. 100개 넘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중 절반 정도가 실제 출시됐다.
또래들끼리 모여 자유롭게 수다 떨다 보니 회의가 아니라 쉬는 시간 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한다. 상사 눈치, 동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종치기 전까지 집중해 일을 마무리 짓고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한다. 이들은 갓생기획팀으로 배치된 후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갓생기획팀의 모토는 ‘아이디어의 NO가 없게 하자’다. 팀장이 없고 누구나 상품 개발, 콘텐츠 생성과 관련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제품 제작부터 마케팅까지 참여한다. 수직적인 보고 체계를 없애고 자유롭게 소통한 게 통통 튀는 신상품을 만드는 데 주효했다.
이용희 매니저는 “갓생기획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만든 ‘엔분의 일 단팥빵(엔빵)’에 가장 애정이 간다”고 말했다. 요즘 더치페이를 많이 하는 세대상을 반영해 반죽도 4개를 따로 만들고 마지막 과정에서 붙여 떼어지기 쉽게 만들었다. 그는 “언어유희적인 측면도 있고 ‘공정’ 키워드가 잘 녹여진 재밌는 상품”이라고 설명했다.
갓생기획팀 직원들의 직장 내 목표는 무엇일까. 선우정 매니저는 ‘크리에이터’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수용성만 있으면 힙(HIP, 유행하는 것)한 것을 다 따라오시더라. 나이가 들어도 열린 마음으로 젊은이들의 생각을 듣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은진 매니저는 현재 업무 내용을 살려 ‘유튜브 마케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용희 매니저는 ‘점포 경영주’라고 답했다. 그는 최근 선우정 매니저가 세계관을 구축한 전주 우주 세계관 특화매장 ‘Z PLANET(제트플래닛)’을 다녀온 후 이런 매장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