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루이비통 남성복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한정판 운동화 리셀(Resell·재판매) 시장이 들썩였다. 아블로가 2017년 처음으로 나이키와 협업해 만든 22만6600만원짜리 ‘조던1X오프화이트 레트로 하이 OG 시카고’의 가격이 하루 만에 1100만원으로 치솟은 것이다. 전날까지 이 신발은 670만원에 거래됐다.

스니커즈로 촉발된 리셀테크(리셀+재테크)가 소비재 전반으로 확산할 태세다. 희소성이 높은 제품을 구해 웃돈을 받고 되파는 것으로, 중고거래와는 또 다른 소비 행태로 자리 잡고 있다. 주식 열풍을 계기로 재테크에 관심을 가진 20~30대들이 운동화와 명품, 시계, 굿즈(기념품) 등의 재판매를 통해 재테크를 일삼으면서다.

그래픽=이은현

◇등골 브레이커라고? MZ세대의 이유있는 명품 집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지난해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백화점은 재작년 5개에서 11개로 증가했다. 명품 매출이 급증한 것이 원인이다. 명품 구매자 중 절반은 20~30대였다.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명품 매출에서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0년대생)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29.3%에서 지난해 50.7%로 커졌다. 백화점 큰 손 절반이 MZ세대인 셈이다.

젊은이들이 명품 구매를 늘린 이유는 최신 트렌드와 경험을 중시 여기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과시(플렉스)하려는 성향에 더해, 명품을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원인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노션 데이터커맨드팀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명품 검색과 함께 재테크, 투자, 리셀 등의 검색이 함께 증가했다.

MZ세대는 명품을 살 때 나중에 되팔 때의 환금성(換金性)을 고려한다. 명품을 사서 쓰다 중고로 되팔 건, 온전히 투자 목적으로 구매하건 간에 되팔 때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따진 후 제품 구매를 결정한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고급스럽거나 희소성이 높은 제품을 선호한다. 샤넬 가방이나 디올과 나이키가 협업해 만든 운동화처럼 인기 명품의 경우 일단 구매만 하면 몇백만원은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에는 명품을 조각 투자하는 플랫폼도 등장했다.

그래픽=이은현

이들은 부모를 졸라 고가의 패딩 재킷을 사던 철없는 ‘등골 브레이커’와는 차원이 다르다. 한 30대 직장인은 “1000만원짜리 샤넬 백을 사 몇 번 들고 SNS에 자랑한 후 몇 개월 후 900만원에 되판다면, 결국 100만원에 샤넬 백을 누린 셈”이라며 “알뜰하게 명품을 즐겼으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래플이 달군 ‘스니커 테크’… 롯데·신세계도 뛰어들어

리셀테크를 주도한 건 운동화다. 국내에선 2019년 말 가수 지드래곤이 나이키와 협업해 출시한 한정판 신발 ‘에어포스1 로우 파라노이즈’(발매가 21만9000원)가 출시된 후 리셀과 래플(Raffle·온라인 추첨방식 판매)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818켤레만 발매된 이 신발은 발매 즉시 리셀 가격이 1300만원까지 치솟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25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명품 재테크는 수백만원의 밑천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지만, 운동화는 10만~20만원 정도의 여윳돈과 약간의 부지런함, 적당한 운만 있으면 획득할 수 있어 MZ세대에게 선호된다. 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Open Run)이 기본인 명품과 달리 래플이라 불리는 온라인 추첨제가 보편화된 것도 장점이다. 당첨만 되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는 데다, 안 팔리면 신으면 그만이어서 리스크가 적은 투자처로 꼽힌다. 이런 이유로 ‘스니커 테크(스니커즈+재테크)’라 불리기도 한다.

미국 운동화 리셀 거래소 스톡엑스(StockX)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정판 운동화 구매자의 37%가 구매 동기로 ‘투자 기회’를 언급했다. 스톡엑스 사용자의 70%는 35세 미만인 것으로 알려진다.

네이버의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 /크림

미국에서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한정판 운동화의 시세를 매기고 정품 검수까지 해주는 스톡엑스가 출범한 후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네이버의 ‘크림’, 무신사의 ‘솔드아웃’ 등의 전문 거래소가 등장했다. 중고거래 업체 번개장터도 한정판 운동화와 명품 등을 재판매하는 ‘브그즈트랩’을 출범했다. 미국 투자은행 코웬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세계 신발 리셀 시장은 2019년 20억달러(2조3880억원) 규모에서 2025년 60억 달러(약 7조1640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2차 시장으로 인식됐던 리셀의 위력이 커지자 전통 유통업체들도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한정판 운동화 리셀 플랫폼 아웃 오브 스톡을 입점시켰고, 신세계(004170)그룹은 지난 10일 벤처캐피탈(CVC) 시그나이트파트너스를 통해 번개장터에 투자했다. 해외에서도 구찌를 운영하는 프랑스 명품업체 케링이 리셀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의 지분 5%를 인수했고, 프라다·발렌티노 등은 재판매 상점을 준비 중이다.

◇재테크족 노리는 유통업체… “정교한 희소 마케팅 필요해”

최근엔 명품, 운동화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리셀테크를 염두에 둔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커피숍 스타벅스의 굿즈가 대표적이다. 작년 1월 스타벅스가 출시한 플레이모빌 굿즈의 번개장터 검색량은 2~4월 21만700여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18% 증가했다. 가격은 정가(1만2000원)의 5배까지 올랐다. 지난해 삼성전자(005930)가 디자이너 톰브라운과 협업해 출시한 ‘갤럭시Z폴드3·플립3 톰브라운 에디션’은 리셀 시장에서 정가(각각 396만원, 269만5000원)의 2배가량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스타벅스가 출시한 플레이모빌 피규어. /스타벅스

재테크족을 위한 주식 마케팅도 성행한다. 편의점 이마트24는 지난 7월 하나금융투자와 손잡고 주식 도시락을 판매했다. 도시락 안에 네이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의 주식 1주를 받을 수 있는 쿠폰을 동봉했는데, 3일 만에 도시락 2만 개가 판매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일각에선 과도한 리셀 시장의 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줄서기 아르바이트와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래플에 당첨돼 물건을 산 후 비싼 값에 되파는 재판매상(Reseller)으로 인해 개인들의 피해가 늘어날 것이란 판단에서다.

반복되는 협업도 피로감을 높이고 있다. 스톡엑스는 “스니커즈 협업이 과포화 상태”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8월 스톡엑스 발표에 따르면 나이키가 앰부시, 사이키와 출시한 협업 운동화는 전년 대비 신상품 출시 물량이 늘면서 가격 프리미엄이 30% 이상 하락했다. 국내에선 스타벅스가 한 달에 한 번꼴로 한정판 굿즈를 출시하는 것에 항의한 매장 직원들이 트럭 시위를 벌여 비난을 사기도 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재테크 열풍에 올라타기 위해 ‘득템력’을 공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득템력이란 지불 능력만으로 얻을 수 없는 상품을 얻어내는 소비자의 능력이다. 김 교수는 “상품 과잉의 시대,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자의 관심을 사로잡는 제품, 브랜드, 마케팅으로 화제성 확보해야 한다”며 “갖고 싶다는 갈증과 부정적 정서 사이에서의 적당한 줄타기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