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쿠팡 본사(쿠팡 INC) 이사회에서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 측 이사인 리디아 제트(Lydia Jett)가 사임했다. 손 회장이 지난 9월 쿠팡 지분 2조원어치를 대량 매각한 데 이어 이사회에서도 비전펀드 측 인사가 빠진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쿠팡의 누적 적자가 심화되고 플랫폼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손 회장이 쿠팡에 대한 투자금을 회수하며 서서히 손을 떼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4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따르면 리디아 제트는 지난달 26일 쿠팡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리디아 제트는 비전펀드의 쿠팡 담당 펀드매니저로 2018년부터 쿠팡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리디아 제트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을 거쳐 소프트뱅크에서 이커머스(전자상거래)를 맡고 있다.
쿠팡 지분은 미국 쿠팡이 100% 갖고 있다. 미국 쿠팡 이사회에는 올해 초 기준으로 김범석 의장, 강한승·박대준 대표를 포함해 총 12명이 있는데 리디아 제트가 사임하며 11명이 됐다. 우버 출신의 투안 팸 최고기술책임자, 아마존 출신의 고라브 아난드 최고재무책임자, 밀리콤 부사장 출신의 해롤드 로저스 최고행정책임자, 투자 회사 그린옥스 캐피탈 파트너 창립자인 닐 매타, 벤처캐피탈 로즈파크어드바이저 공동 창립자인 매튜 크리스텐슨, 벤처캐피탈 프라이머리 벤처파트너스 공동 창립자인 벤자민 선,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이사회 이사 출신 케빈 워시,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GTY테크놀로지 홀딩스 부회장인 해리 유 등이 이사로 활동 중이다.
손 회장은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를 통해 2015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쿠팡에 30억달러(3조5000억원)를 투자했고 쿠팡 주식 6억2515만6413주를 보유 중이었다. 쿠팡이 3월 1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할 때만 해도 쿠팡의 성장성을 믿는다며 쿠팡 주식을 팔지 않겠다고 했지만 보호 예수 기간이 끝나자 9월 14일 보유 주식의 약 10%인 5700만주를 16억9204만달러(약 2조원)에 팔았다. 보호 예수는 기관 투자자 등 주요 주주가 상장 후 일정 기간 주식을 팔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보호 예수 기간이 끝나면 단계적으로 매도할 수 있다. 소프트뱅크는 여전히 쿠팡의 최대 주주다.
쿠팡은 2010년 설립 후 지난해 말까지 누적 적자 4조8000억원을 기록하는 등 한 번도 영업이익을 낸 적이 없다. 올해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1% 증가해 44억7800만달러(5조1810억원)를 기록했지만 순손실은 지난해 같은 기간 1억205만달러(1178억원)에서 5억1860만달러(5895억원)로 급증했다. 쿠팡은 공모가 35달러(4만원)로 미국 주식에 상장했으나 3일 쿠팡 주가는 공모가보다 13% 떨어진 30.4달러(3만6000원)로 상장 첫날 종가(49.52달러)보다 39% 떨어졌다.
한국 정부가 플랫폼 규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소프트뱅크가 선제적으로 리스크(위험) 관리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쿠팡은 올해 초 SEC에 제출한 상장 신고서에서 한국에서 사업하며 적용받는 법률·규정 18개를 ‘위험 요소’로 자세히 적으며 “위반 시 비용·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했다. 대형 유통업체가 납품업체에 가격을 후려치거나 반품을 강요하면 피해액의 3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대규모 유통업법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한편 블룸버그는 비전펀드가 지난 9월 쿠팡 주식 등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15억달러(1조7710억원)를 대출받았고,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이 들어올 경우 쿠팡 주식 등을 매각해야 한다는 대출 조건을 달았다고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를 인용해 지난달 28일 보도했다. 이에 비전펀드가 금융기관의 마진콜에 따라 쿠팡 주식을 팔 경우에 대비해 비전펀드 측 리디아 제트가 이사회에서 사임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