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 제작한 주얼리 디자인 오픈합니다. (중략) 기분 좋은 ‘나’에게 주는 특별하고 스페셜한 선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지난달 27일 자신을 루시라고 소개한 여성이 인스타그램에서 주얼리 전문 브랜드 오에스티(O.S.T)와 제작한 목걸이, 반지, 팔찌 등 6개 품목을 일주일간 공구(공동구매)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일반인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각종 제품을 파는 공구는 흔하다. 그러나 유명 브랜드와 제품을 제작해 파는 경우는 웬만한 유명인이 아니면 힘들다.

롯데홈쇼핑의 가상모델 루시가 지난달 인스타그램 계정에 오에스티 주얼리를 공동구매한다며 올린 사진. / 루시 인스타그램 캡처

루시는 본인을 ‘29세, 본캐(본래 캐릭터) 디자인 연구원, 부캐(부 캐릭터) 패션모델·취미부자’라고 소개한다. 활동은 오직 인스타그램, 블로그로 한다. 지난 2월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한 지 반년 만에 팔로워 수가 3만명을 넘었다. O.S.T 공구에 앞서 지난 8월엔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의 초청을 받아 오프라인 문화 공간 무신사 테라스에 방문했고 9월엔 햄버거 브랜드 쉐이크쉑과 신제품 출시 기념 이벤트를 했다.

O.S.T를 운영하는 이랜드 측 관계자는 루시와 협업한 배경 중 하나로 “리스크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이미지가 망가지거나 스캔들에 휘말릴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유명인. 루시는 롯데홈쇼핑이 선보인 가상모델이다. 최근의 가상모델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3D 모델보다 더 인간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버추얼 인플루언서(virtual influencer·가상 유명인), CGI 인플루언서(Computer-generated imagery,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의 유명인)라고도 한다.

루시를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본 사람들은 당연히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롯데홈쇼핑이 굳이 루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데다 루시의 모공, 솜털, 눈의 핏줄은 물론 빛의 각도, 명암까지 실제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에 가깝게 재현하기 때문이다. 지난 5일 루시가 만들어지는 서울 강남구의 한 제작사를 찾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는 사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봤다.

롯데홈쇼핑이 약 1년 가까이 내부 검토를 거쳐 만든 루시의 외형. 특정 장소에서 대역 모델과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루시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 이현승 기자

현재 가상모델을 제작하는 기술은 크게 딥페이크 방식이나, 3D 애셋 방식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딥페이크는 영상에 다른 영상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실제 모델의 얼굴에서 크게 변형하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루시는 3D 애셋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루시의 외형을 일단 3D로 만들어놓고(이를 애셋이라고 한다) 대역 모델이 특정 장소에서 찍은 사진에 루시의 애셋을 합성한다. 이후 영화, 광고에 활용되는 VFX(시각특수효과) 기술을 활용해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보정한다.

작업 과정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 중 하나가 마지막 보정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장비로 찍느냐에 따라 사진을 찍었을 때 얼굴에 생기는 음영이 다르다. 이를 최대한 실제에 가깝에 재현해야 사람들이 봤을 때 위화감이 없고 실제 사진이라고 느낀다. 최근에는 화보가 아니라 실제로 찍은 느낌을 주기 위해 대역 모델 사진을 고성능 DSLR이 아니라 일반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있어 빛 보정이 더욱 어려워졌다.

국내 홈쇼핑 업계에서 가상모델을 만든 건 롯데홈쇼핑이 처음이다. 작년 12월 출범해 루시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는 디지털사업본부 MCN(Multi Channel Network·인터넷 유명인의 콘텐츠 관리)셀에서 근무하는 김서정 매니저는 “홈쇼핑의 주요 고객이 40~60대인 상황에서 새로운 젊은 그룹을 유입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며 “홈쇼핑의 한계를 넘어 고객 시장을 확대하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측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루시의 외모는 MZ세대가 좋아할 만한 특성을 조합해 몇 가지 샘플을 만든 뒤, 사내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 나이나 직업적 특성을 정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29세란 나이는 국내 기업들이 선보인 가상모델이 대부분 20대 초반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높다. 김 매니저는 “MZ세대만을 타깃으로 할 건지, 홈쇼핑 주 고객층인 4060대를 포함할 건지 고민이 많았다”며 “이제 가상모델 시장이 시작된 만큼 한계가 생기지 않도록 너무 어리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루시의 인스타그램에 어떤 게시물을 올릴지는 30대인 김 매니저와 MCN셀에 있는 20대 직원이 결정한다. MZ 감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MZ 세대라고 판단해서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해야 하므로 너무 많은 사람이 개입되선 안된다는 점도 감안했다. 루시가 요즘 2030 여성이 많이 가는 백화점 더현대서울, 카페 누데이크, 원인어밀리언에 방문하거나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며 뒹굴거리는 사진을 찍어 올린 것도 두 사람의 아이디어다.

롯데홈쇼핑은 루시의 영상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 고화질 영상 컨텐츠 제작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 포바이포에 30억원을 투자해, 루시를 쇼호스트로 데뷔시키기로 했다. 김정도 MCN셀장은 “최대한 사람 답게 만들기 위해 추가적으로 필요한 기술이 많다”며 “영상을 제작하게 되면 음성이나 말투까지 신경써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과제가 많다. 벤치마킹할 곳이 없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세계 가상모델 중 수입 1위인 미국의 릴 미켈라. /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캡처

가상모델 열풍은 한국 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스타트업 브러드가 지난 2016년 선보인 가상모델 릴 미켈라는 작년 1170만달러(130억원)의 수입을 거뒀다. 일본 3D 이미지 스타트업 AWW가 2019년 공개한 가상모델 이마는 작년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가 모델로 발탁해 화제가 됐다. 이마는 일본 아마존 패션쇼 홍보 대사, 포르쉐 모델로도 활동했다.

기술 발달로 가상모델은 점점 더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고 무엇보다 외형이 변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스캔들에 휘말릴 걱정도 없기 때문에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다만 가상모델이 사람을 대체할 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홍콩 마케팅 회사 레드앤트아시아의 비올라 첸 전략가는 지난달 CNN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이 직접 체험해 성능을 검증해야 하는 화장품 모델로 가상모델이 적합한지에 대해서 벌써부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