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올 들어 후불결제 서비스 ‘나중결제’ 한도를 배 이상 늘리고 무이자 할부를 도입하는 등 한국형 BNPL(Buy Now Pay Later), 이른바 디지털 외상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일본 소프트뱅크그룹과 아마존, 페이팔 등 글로벌 기업들이 BNPL 시장에 주목하는 가운데, 분기 활성고객 수가 1700만명에 이르는 쿠팡이 한국 시장에서 경쟁자를 따돌리고 우위를 점하려는 포석이다.

2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쿠팡은 작년에 나중결제를 일부 고객을 대상으로 시범 도입한 데 이어 최근에는 월 한도를 최대 130만원까지 확대했다. 이용 대상 고객은 쿠팡이 내부 기준에 따라 선정하며 월 한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부여한다. 고객은 당장 계좌에 돈이 없어도 이용한도 내에서 쇼핑하고 다음달 15일까지 계좌에 돈을 넣어두면 된다.

쿠팡이 최근 일부 고객을 대상으로 나중결제 한도를 월 50만원에서 130만원으로 확대했다. / 독자 제공

연체가 없는 일부 고객을 대상으로는 무이자 할부 서비스까지 시작했다. 쿠팡 측은 나중결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고객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 월 한도를 부여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쿠팡의 나중결제는 신용카드 서비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금융당국은 ‘쿠팡이 직매입한 상품만 나중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봤다. 신용카드처럼 범용성(汎用性)이 없다는 것이다. 쿠팡이 직매입한 상품을 구입할 때만 나중결제를 쓸 수 있으므로, 상품대금을 받아야 하는 주체가 100% 쿠팡이다. 쿠팡이 고객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 기간을 약간 늦춰주는 외상 개념이다.

반면 네이버(NAVER(035420))와 카카오(035720)가 추진중인 후불결제 서비스는 편의점과 교통수단 등에서 사용할 수 있어 신용카드업에 해당한다고 봤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상거래를 하긴 하지만 직매입을 하지 않고 거래를 중개하는 오픈마켓 형태여서, 카드 사용처를 확대하기 위해 외부 기업들과 제휴를 맺고 있다. 현행법상 신용카드업 허가를 받지 않고 후불결제 신용카드 발급은 불가능하지만,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 네이버파이낸셜의 소액 후불결제를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해 규제 특례를 부여하기로 했다.

유통업계에선 쿠팡이 나중결제를 통해 고객의 상품 구입을 유도할뿐 아니라 락인(Lock-in, 가두기) 효과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체류시간을 늘리고 구매금액을 확대할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신용도가 낮은 대학생, 주부, 자영업자 등을 신규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자체 보유한 고객의 소비 데이터를 토대로 나중결제 한도를 준 뒤 소비·결제 패턴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자체 신용평가시스템을 구축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쿠팡은 애초에 꾸준히 상품을 사고 제때 갚는 고객에게 한도를 준다. 이 때문에 돈을 떼일 가능성이 크지 않고 연체를 한다고 해도 하루 0.03%, 연 12%의 수수료를 부여한다. 카드사 연체 수수료율(최대 연 23.90%)에 비하면 낮지만 신용도가 낮은 고객에겐 부담이 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제때 대금을 결제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쿠팡은 연체 발생에 대비해 올해 초부터 채권 데이터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전문 상담사를 채용했다.

BNPL 시장은 정규직 여부, 연봉이나 재산 수준 등 한정적인 금융 정보를 잣대로 개인의 신용도를 매기는 기존 신용정보 시스템에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목받고 있다. 온라인, 모바일 소비가 급증하는 가운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용시장이 휘청이고, 정규직에 목메지 않고 프리랜서나 계약직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대안 신용정보 체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미국 금융서비스업체인 피델리티내셔널인포메이션서비스(FIS)에 따르면 세계 전자상거래 결제 시장에서 BNPL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2.1%였으나 2024년에는 4.2%로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에 비해 스타트업의 금융 진출에 호의적인 유럽에선 13.6%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FIS는 전망했다. 이 분야에서 선두기업으로 평가받는 스웨덴 핀테크 기업 클라나(Klarna)는 지난 6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비전펀드 등으로부터 6억3900만달러(7500억원)를 투자 받으면서 기업가치를 53조원으로 평가 받았다.

스웨덴 핀테크 업체 클라나(Klarna)가 자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쇼핑하고, 결제 단계에서 클라나를 선택하면 후불결제가 가능하다. / 클라나 제공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이자, 쿠팡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미국 업체 아마존은 지난달 27일 BNPL 서비스 제공업체인 어펌홀딩스와 제휴해 미국에서 일부 고객을 대상으로 후불결제 서비스를 시작한 뒤 수개월 내에 미국 전역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어펌홀딩스는 미국 결제업체 페이팔 홀딩스의 공동창업자 맥스 래브친이 2012년에 설립한 회사다. 1분기 거래액이 23억달러(2조7000억원)로 전년 대비 80% 늘었고 1월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했다.

그러나 BNPL은 고금리 신용대출을 부추기거나, 후불결제 한도를 현금으로 사고 파는 이른바 ‘페이깡’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현행법상 규제할 방법은 없다. 4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한 네이버 카페에는 “쿠팡 나중결제 한도를 75% 가격에 판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호주 증권투자위원회의 작년 11월 발표에 따르면 BNPL 서비스를 사용한 소비자 15%가 지난해 후불결제 대금을 제때 갚기 위해 추가 대출을 받아야 했다. 영국의 한 시중은행 조사에 따르면 BNPL 서비스를 이용한 66만명의 소비자 중 10%가 그들에게 주어진 결제한도를 초과해 소비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