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TMO로 이동하고 있는 군 장병들. /연합뉴스

지난달 전역한 육군 교육사령부 소속 김모 예비역 병장은 전역을 앞두고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혹시 영양크림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PX에서 달팽이크림이랑 마유크림, 다른 영양크림을 시중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판다. 필요하면 나갈 때 사가겠다”고 했다. 김 병장의 어머니는 “괜찮다”고 했지만, 김 병장은 뭐라도 사가고 싶은 마음에 영양크림을 몇 개 구입해 어머니와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김 병장은 지인에게 선물을 주면서 “밖에선 20만원 정도 한다는데, PX에선 1만원도 안된다”라고 말했다.

작년부터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휴가가 제한되자 PX에서 화장품을 구입해 집으로 보내는 장병들이 많아졌다. 군대 안에서 직접 택배를 보내는 것은 제한되는 만큼 대부분 친한 장교나 부사관에게 부탁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보낸다. 휴가는 못나가지만 선물로라도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려는 마음에서다.

◇ “시장가 대비 90% 이상 세일”… 화장품 명소 된 PX

몇 년 전부터 PX는 화장품 구입 명소가 됐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도 ‘PX’를 치면 추천 검색어로 ‘PX 화장품 추천’이 뜰 정도다. 2년 전인 2019년에는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이 PX에서 화장품을 대량 구매한 뒤, 오픈마켓 등을 통해 재판매를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PX 화장품이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높은 할인율 때문이다. 크림류의 경우 90% 할인도 할인율이 낮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PX 화장품의 대표 품목은 달팽이 크림과 마유 크림이다. 유분이 많고 발림성이 좋다는 이유로 10여년 전 화장품 업계에서 인기를 끈 소재였지만, 지금은 유행이 지나 시중 화장품 매장에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제품들은 출시 초기만 해도 고기능성 제품으로 고가에 판매됐으나, 인기가 식으면서 가격도 내려가는 추세다.

2019~2020년 PX 납품 낙찰 화장품의 가격표. /성일종 의원실

현재 시중 로드샵에서 판매되는 달팽이크림의 가격은 2만원 내외다. 1만원대 이하의 상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군대에 납품하는 회사들은 자사의 달팽이크림의 가격이 10만원대를 초과한다고 주장한다.

국회 국방위원회 야당 간사인 성일종 의원실이 국군복지단으로부터 제출받은 PX 납품 화장품의 가격표에 따르면 2019년 PX 입찰을 통과한 엔프라니의 블랙스네일(달팽이) 리페어크림의 정가는 29만8000원이었다. 2020년 낙찰된 닥터지의 블랙스네일 프레스티지 세트의 정가는 35만원, 같은 회사의 프레스티지 마유크림은 14만9000원을 정가라고 신고했다. 본에스티스라는 신생 업체는 56만5000원짜리 영양크림 세트를 들고 왔다.

화장품 업체들은 납품 입찰 과정에서 이 제품들을 정가 대비 90% 이상 할인한 가격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엔프라니는 블랙스네일 리페어 크림의 판매 단가를 7700원으로 제시했고, 닥터지는 블랙스네일 세트는 3만2690원, 마유크림은 9510원에 팔겠다고 했다.

이 판매단가는 PX 관리수수료 6.09%, 복지수수료(복지율) 7.2%, 카드수수료 2.5%와 물류비용이 모두 포함된 가격이다. 군납 정보에 능통한 한 관계자는 “수수료와 물류비용 등으로 판매단가의 30%가 빠진다고 생각하면 된다”면서 “블랙스네일 리페어 크림 하나를 팔아 화장품 회사가 가져가는 돈은 5000원 내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시중가 29만8000원짜리를 납품해 5000원만 받아가겠다는 것인데, 악성재고를 일시적으로 털기 위한 목적이라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납품하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거래”라고 말했다.

한 군부대 내 생활관의 PX.

◇ PX 판매단가를 기준으로 정가 책정

최근 화장품 업계에서는 중소·신규업체들이 군납 시장을 노리고 ‘기획 상품’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군납을 하고 있는 한 화장품 대기업의 관계자는 “시중 정상가가 2만~3만원대에 불과할 상품을 20만원이 넘는 초고가로 책정한 뒤, 납품 심의에선 90% 이상 할인율을 제시하는 식으로 입찰에 나서는 업체들이 최근 급격히 늘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지난해 입찰을 통과한 회사들은 자사 제품을 정가에서 90~95% 할인한 가격에 판매하겠다고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2022년 납품 업체 입찰에서는 낙찰을 받으려면 할인율이 97%는 돼야 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제조사들이 제출한 정가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낙찰의 성패를 ‘할인율’이 결정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덧붙였다.

국군복지단은 현장 실사 및 가격 조사 결과 ‘적격’ 판정을 받은 물품에 한해 ‘서류심사·심의위원 평가’ 50% + ‘판매가 할인율’ 50%를 합산한 뒤 위탁 판매 물품을 선정한다. 문제는 유통단위와 가산점을 더하는 서류심사와 갑·을·병 세 그룹으로 진행되는 심의위원 평가에선 각 제품 간 점수차가 크지 않아 변별력이 없다는 점이다. 적격성 판정도 납·비소·수은 등 안전성 검사 항목에 대한 국가공인기관 시험성적서 제출로 대신한다. 결국 최종 당락의 성패는 할인율이 결정한다.

업계에서는 군대에 납품하려는 일부 업체는 PX에서 판매할 가격을 먼저 정하고, 여기에 할인율을 역산해 정가를 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PX 납품이 결정되면 해당 제품의 시장 가격은 폭락한다. 현재 엔프라니 블랙스네일 리페어 크림은 온라인에서 3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정가가 14만9000원이라고 한 닥터지의 프레스티지 마유크림은 1만~2만원대에 구매가 가능하다.

화장품 대기업 관계자는 “애당초 가격에 거품이 낀 제품은 90% 이상 할인을 한다고 해도 소비자에겐 혜택이 없게 된다”면서 “군인 복지 차원에서 제공하는 가격 할인의 의미가 퇴색되고, 가격 경쟁이 심해질 경우 제품의 질이 악화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브랜드 가치 유지 차원에서 높은 할인율을 제시하기 어려운 유명 브랜드의 제품은 경쟁에서 도태돼 군인들이 고급 브랜드 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라고 말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은 “장병들이 그동안 거품 가격을 앞세워 PX에 납품된 화장품을 쓰고 있었다면 심각한 문제”라며 “판매가 할인율 점수를 과도하게 반영한 것이 가격 거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성 의원은 이어 “장병 복지 개선과 공정한 경쟁 입찰을 위해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번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국군복지단이 이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철저하게 따져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