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069960)그룹은 3세가 경영권을 잡은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지배구조가 안정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이 각각 백화점·유통과 비유통 부문으로 나눠 맡은 ‘형제 경영’ 체제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현대백화점그룹은 1971년 금강개발산업으로 출범했다. 현대건설의 공사 현장에 식품, 의복 등을 공급하던 회사였다. 이후 1985년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백화점업을 개시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삼남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이 보유한 금강산업개발의 지분 30%를 넘겨받아 1999년 4월 현대그룹을 떠났다. 이듬해 사명을 현대백화점으로 바꿨고, 3세 승계 작업에도 일찌감치 착수했다.
재계 서열 21위인 유통 대기업이지만 지분 증여 등 경영권 승계 작업은 일찌감치 마무리됐고, 정 회장이 아직 40대 후반인만큼 후계구도에 대한 부담도 없는 상태다. 정지선 현(現) 회장은 1997년 과장으로 현대백화점에 입사했고, 2003년 부회장직을 거쳐 2008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 유통 정지선·비유통 정교선 ‘형제 경영’
현재 그룹은 백화점·유통 부문 계열사는 장남인 정지선 회장이, 비백화점 부문은 차남인 정교선 부회장이 이끄는 체제다. 정몽근 명예회장이 장남에게는 현대백화점 주식을, 차남에게는 현대그린푸드(당시 현대백화점H&S) 주식을 각각 증여하면서 만들어낸 구도다.
백화점 사업의 주축인 현대백화점은 한무쇼핑, 가전제품 대여사업체인 현대렌탈케어, 부동산기업인 현대쇼핑, 현대백화점면세점, 현대홈쇼핑(057050)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식자재유통·급식업체인 현대그린푸드(453340)는 중장비 제조회사인 에버다임, 현대드림투어 등을 계열사로 갖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2003년부터 현대백화점에서 근무 중이던 정지선 회장(당시 부회장)에게 주식을 증여했고, 정 회장 역시 장내매수를 통해 현대백화점 주식을 꾸준히 사들였다. 정 명예회장의 증여분(13.55%) 덕에 정 회장은 2004년 단숨에 최대주주가 됐다. 이후 정 명예회장의 주식을 일부 추가로 인수한 정 회장의 현재 지분율은 올해 3월 기준으로 17.09%다.
정교선 부회장은 현대백화점 상무 등을 거치며 경영 수업을 받았고, 2006년 정 명예회장의 현대백화점H&S 지분 10%를 증여받았다. 현재 현대그린푸드 지분 23.8%를 가진 최대주주다. 그룹 부회장직 외에도 현대백화점 사내이사직과 현대홈쇼핑의 대표이사직을 겸직 중이다.
◇ 순환출자 해소한 현대백화점...신세계처럼 형제간 계열분리 할까
다만 10년 넘게 이어져 온 형제 경영 체제가 향후에는 계열분리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정지선 회장은 그룹 내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 2018년 은행 대출과 보유 주식을 처분한 자금으로 현대쇼핑이 보유한 현대A&I 지분 21.3%를 사들였다.
이를 통해 ‘현대백화점→현대쇼핑→현대A&I→현대백화점’으로 이어지던 출자 고리를 풀었다. 정 부회장 역시 현대쇼핑이 보유한 현대그린푸드 지분 7.8%를 사들여 ‘현대백화점→현대쇼핑→현대그린푸드→현대백화점’으로 연결되던 고리를 끊었다.
그럼에도 현재 두 형제의 지분 관계는 여전히 얽혀있다. 현대백화점의 최대주주는 정 회장이지만, 현대그린푸드가 백화점 지분 12.05%를 가진 주요주주다. 정 회장 역시 현대그린푸드의 지분 12.7%를 보유한 2대주주다.
주요 계열사들도 현대백화점과 현대그린푸드가 지분을 나눠가진 경우가 많다. 현대렌탈케어, 한섬, 현대L&C 등의 최대주주인 현대홈쇼핑은 현대백화점(15.8%)과 현대그린푸드(25.01%)가 지배하는 구조다. 현대그린푸드에서 인적분할 해 설립한 현대A&I의 최대주주는 정 회장이지만, 현대그린푸드도 지분 10.41%를 보유한 3대주주다.
이 때문에 대형마트와 호텔 사업을 꾸려나가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백화점·패션 사업을 맡은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사업 부문을 나눠 지분을 정리했듯, 현대백화점그룹의 형제 경영도 언제든 계열분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농심그룹도 고(故) 신춘호 회장의 별세 이후 삼남매간 계열분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평가한 현대백화점그룹의 2021년 공정자산 총액은 18조3130억 원이다. 이중 현대그린푸드의 연결 기준 자산총액은 3조1877억 원(3월말 기준)이다. 두 회사가 계열 분리하면 정교선 부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린푸드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 집단에서 제외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기업의 자산총액 5조원이 넘으면 공정위의 대기업 집단에 포함되는데, 공정거래법에 따라 30개 항목에 대한 공시 의무가 생기고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된다.
△국내 계열회사 간 주식 소유 현황 △자금거래 현황 △특수관계인에 대한 자금대여 현황 △계열회사 간 유가증권거래 현황 △특수관계인에 대한 유가증권거래 현황 등은 분기별로 공개해야 한다. 비상장 자회사의 최대주주 및 임원 변동, 인수합병 등 주요사항도 공시해야 한다. 누락하거나 지연 공시하면 공정위 제재를 받는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주식스왑(지분 맞교환)이다.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그린푸드 지분과 현대그린푸드가 가진 현대백화점 지분을 차액과 함께 맞교환하거나, 현대백화점과 현대그린푸드를 중심으로 주요 계열사들이 자사주를 매입해 지분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정 부회장이 현대백화점과 현대홈쇼핑의 등기임원인 점과 필요한 재원 등을 고려하면, 당장 계열분리가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보유한 현대그린푸드 주식 약 1238만주의 가치는 14일 종가 기준으로 약 126억 원이지만, 현대그린푸드가 가진 현대백화점 지분 약 282만주의 가치는 2343억 원에 달한다. 이 경우 2000억 원의 차액을 상계할 방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