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스토어 갔다가 밥 먹으러 세로수길 가는 길목에 있길래 들렀죠. 코로나 전만 해도 틈만 나면 가로수길에 옷 구경하러 왔었는데 이제는 목적 없으면 안 와요.”
지난 24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 에잇세컨즈에서 재킷을 둘러보던 이수빈(27)씨는 가로수길의 의류 매장들이 불과 2~3년 사이에 대부분 사라졌다며 탄식했다. 그는 “스파오, 어라운드더코너, 자라 다 사라졌다”며 “더이상 옷 구경하러 이곳을 오진 않고 저녁에 친구들이랑 술 마실 때 세로수길은 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가로수길 1년 새 공실률 27% 증가… 대기업들도 줄줄이 철수
한때 패션·뷰티 대표 거리였던 가로수길은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공실률이 30%대를 기록하면서 사람들이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울려 퍼졌다. 간간이 중국어와 영어 등 외국인 관광객의 대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가로수길 한 줄에 통째로 빈 건물만 14채였다.
글로벌 부동산서비스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따르면 서울 6대(명동, 강남역, 홍대, 가로수길, 한남·이태원, 청담) 가두상권 중 가로수길만 올해 2분기 공실률 30%대를 기록했다. 가로수길의 올해 공실률은 36.5%로 지난해 대비 27% 증가한 수준이다.
이날 가장 사람이 많은 의류 매장은 삼성물산이 운영하는 SPA(제조생산일괄화) 브랜드 에잇세컨즈였다. 10분 동안 해당 매장에 들어선 손님은 15명 남짓. 같은 시각 단 한 명의 방문객도 방문하지 않는 주변 매장도 3~4곳 눈에 띄었다.
전문가들은 가로수길이 활력을 잃은 가장 큰 이유로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원주민 유출 현상)을 꼽았다. 이 탓에 대기업 안테나숍(전략점포)도 임차료를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는 것이다.
가로수길 주변 공인중개업소 A씨는 “가로수길 매장 임대인들이 10평(약 33㎡)에 월세 2800만원을 부르고 있다”며 “대기업이 안테나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고선 들어올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10년 전 가로수길이 인기를 끌 때는 매장 하나가 폐점하면 임대인이 다음 임차인에게 월세 100만원씩을 올려받아도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임대인들이 그때 생각을 하며 가격을 안 내리고 건물을 그냥 비워두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화장품 매장 점원 B씨는 “월세는 비싼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겪으며 급격히 손님이 줄어 적자가 크다”며 “주변 의류·뷰티 매장들도 마찬가지 사정일텐데 옛날부터 가로수길이 패션 대표 거리니까 브랜드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앞으로 사정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로수길 주변 골목 상권은 ‘북적’… “가로수길 되살아나지 않으면 한계 있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친구들과 세로수길(가로수길에서 뻗어 나간 골목)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 리우팅(24)씨는 한 손에 탬버린즈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는 “제니가 광고하는 탬버린즈에 가려고 세로수길에 들렀다”고 말했다.
탬버린즈 인근 카페 대표 C씨는 “주말이면 제니 사진 앞에서 셀카를 찍으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며 “이렇게 붐비는 브랜드가 많아져야 주변 식당과 카페도 살 수 있는데 가로수길이 죽어서 세로수길이 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튜버나 외국인들에게 유명해진 식당 몇 곳은 웨이팅을 할 정도로 사람이 붐비지만 나머진 손님이 없다”며 “새로 생긴 식당들도 거의 파리 날리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팝업스토어(임시 매장) 등이 즐비한 성수동 등으로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자)나 외국인들이 많이 몰린 것도 가로·세로수길의 인기가 떨어진 원인 중 하나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 따르면 성수의 공실률은 올해 2분기 기준 5.8%다. 올해 상반기 성수의 서비스업, 패션잡화, 일반음식점 등의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41.4% 증가했다.
옥경영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명동이나 가로수길은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에 코로나19의 타격이 컸을 것”이라면서 “이에 더해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겹치면서 무너진 상권이 계속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