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후반 사업가 김씨는 최근 당뇨병과 고혈압 진단을 받으면서 남겨진 가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김씨는 아내와 함께 열두 살 아들, 열 살 딸을 키우고 있다. 만약 자신이 일찍 사망하면 가정주부인 아내가 자신을 대신해 사업을 운영하고 두 자녀까지 키울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김씨는 만일의 위험에 대비해 은행을 찾아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맺었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운영 중이던 사업체 지분은 두 자녀에게 각각 40%, 아내에게 20% 배분하기로 했다. 보유 재산은 은행에 맡기고 매년 일정 금액을 가족에게 지급하도록 설계했다. 김씨는 “유언대용신탁 계약 구조를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최근 사망보험금을 금융회사에 맡겨 운용한 후 사전에 지정한 방식으로 가족에게 지급하는 보험금 청구권 신탁이 허용되면서 금융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피상속인의 유언대로 상속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은행권 유언대용신탁도 이미 인기를 끌고 있다.
신탁을 그대로 풀이하면 믿고(信·믿을 신) 맡긴다(託·부탁할 탁)는 뜻이다. 법률적으로는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재산의 관리와 처분을 남에게 맡기는 일’로 정의한다. 고객이 금융사 등 신탁업자에 재산을 맡기고, 신탁업자는 그 재산을 계약에서 정한 방법에 의해 관리 또는 처분하며, 운용상 발생한 수익은 계약에서 정한 수익자에게 주는 구조다.
신탁이란 용어를 평소에 잘 쓰지 않고, 신탁 서비스 구조도 다소 복잡해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 간 상속 재산 분쟁을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엔 평범한 중산층 가정까지 이용하고 있다. 금융사들의 증여 관련 신탁 서비스의 종류와 활용법을 알아본다.
◇ 유언보다 쉬운 은행권 유언대용신탁 인기
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위탁자)이 금융사(수탁사)와 계약을 맺고 재산을 맡긴 후 배우자, 자녀 등 수익자·상속인에게 배분하는 서비스다.
고객이 금융사에 현금·유가증권·부동산 등의 자산을 맡기고 살아있을 때는 운용수익을 받다가 사망 이후 미리 계약한 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할 수 있다. 신탁 계약의 기준 없이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증여하거나 상속할 수 있다.
예컨대 부모가 금융사와 신탁 계약을 체결하고 자녀가 부양 의무를 다했을 때 재산을 증여·상속하는 조건을 걸 수 있다. 자녀가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신탁 계약을 해지하고 증여·상속을 중단하면 된다. 미성년 자녀를 대상으로 재산을 상속한다면 금융사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운용 수익을 지급하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은 재산을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유언장을 남기면 되는데 유언대용신탁을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유언은 사후 자신의 재산이 한꺼번에 넘어가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상속자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자산을 상속할 수 있고, 자산의 처분도 제한할 수 있다.
또 법적 효력도 유언장보다 유언대용신탁이 덜 까다롭다. 대표적인 유언 방식인 공정증서는 유언자와 증인 2명이 참석해 공증인이 제대로 유언을 받아 적었는지 승인하고 서명해야 한다. 자필 유언장은 증인이 필요하지 않지만, 본인이 직접 자필로 작성하고 연월일, 주소, 성명을 기재해 날인을 하면 된다. 정확한 형식을 갖추고 생전 의사 표현이 명확한 때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판명돼야 법적인 효력을 지닌다.
반면 신탁 상품은 피상속인과 은행이 계약하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편리하다. 계약한 대로 상속·증여를 집행하기 때문에 법정 분쟁에 휘말릴 여지가 적은 것도 장점이다.
이런 장점 덕에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수탁액은 최근 3년간 연평균 52.4%의 증가세를 보였다.
신탁을 활용한 증여·상속은 언제부터 준비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50대에 접어들면 자산 분배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서 60대 초반에 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신탁 계약에 주의할 점도 있다. 신탁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유류분은 지켜야 법적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유류분이란 피상속인의 유언과 관계없이 특정 상속인이 보장받는 일정 비율의 상속재산을 말한다. 그동안 재판에선 유언대용신탁 재산이 유류분 반환 대상인지를 두고 판결이 엇갈렸지만, 최근엔 유언대용신탁 재산도 유류분 반환 대상이라는 쪽이 힘을 받고 있다. 가족이 여러 명 있는 피상속인이 가족 한 명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기로 신탁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소송을 걸면 다른 상속인들이 유류분만큼 상속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 “내 보험금 함부로 못 쓰도록”…보험금청구권신탁 개시
보험금청구권신탁은 생명보험에 가입한 계약자에게 사고 시 지급되는 사망보험금을 대상으로 한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계약자(위탁자)의 사고 시 지급되는 사망보험금을 신탁회사인 금융기관(수탁자)이 보관·관리·운용 후 사전에 계약자가 정한 방식대로 신탁 수익자에게 지급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매월 일정액을 교육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분할 지급하고, 대학에 입학할 때 목돈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다.
일반사망 보험금 3000만원 이상인 종신보험 및 정기보험이 대상이다. 보험계약자와 피보험자, 위탁자가 모두 동일인이어야 하고 수익자는 직계존비속과 배우자로 제한된다. 신탁 계약 시 보험계약대출(약관대출)은 없어야 한다.
보험금청구권신탁은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자녀에게 생애주기에 맞춰 분할 지급해 자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돕거나, 수익자를 미리 지정해 유가족 간 다툼을 방지고 싶을 때 이용하면 좋다. 이달 12일부터 제도가 시행됐는데, 삼성·흥국생명의 1호 계약 사례자 모두 미성년 자녀를 둔 50대였다. 이들은 자녀가 30∼40대가 되기 전까지는 운용 이자만 지급하다가 이후에 목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보험금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