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에 의거한 업무개시명령은 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협약) 강제 노동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 현 정부는 업무개시명령 등의 공권력을 통해 전공의를 겁박하며 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

17일 의료계에 따르면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3일 이렇게 말하면서 국제노동기구(ILO)에 긴급 개입(Intervention)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료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내린 업무개시명령은 정당한 조치로 강제 노동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정부와 의료계는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ILO 29호 협약을 두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맞서고 있다. ILO 29호 협약 위반 논란은 과거 화물연대 총파업(집단운송거부)과 사회복무요원에게 현역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할 때에도 꾸준히 등장했던 이슈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15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관계자가 세탁된 가운 옆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공의 '업무개시명령은 강제 노동' 주장…정부는 '적용 예외' 해당 반박

ILO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국제기구 중 하나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제적 기준을 마련하고 노동 문제를 논의한다. ILO 핵심협약은 회원국이라면 당연히 준수해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에 대한 협약이다. 강제노동에 관한 ILO 29호 협약은 8대 핵심협약 중 하나로, 한국은 2021년 비준해 2022년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ILO 29호 협약은 처벌의 위협 하에서 강요받았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불법적으로 강요하면 형사범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1930년 채택됐다.

ILO 제29호 강제노동 협약은 ILO의 8대 핵심 협약 중 하나다. 처벌의 위협 하에서 강요받았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불법적으로 강요하면 형사범죄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모든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29호 협약 2조에서는 ▲병역법에 의한 군 복무(징병) ▲통상적인 시민적 의무인 노동 ▲법원 판결로 강요되는 노동 ▲전쟁이나 전염병, 국민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재해나 그런 우려가 있는 경우 강요되는 노동은 강제 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용부는 전공의 단체가 업무개시명령은 강제 노동이라고 주장하자, 이 예외 조항을 들어 반박했다. 전공의들이 대거 의료 현장을 떠나 국민의 안녕을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강제 노동으로 보지 않는 예외 요건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2022년 12월 9일 오후 경기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소속의 한 조합원이 화물차에 걸려 있던 총파업 관련 현수막을 떼어 내고 있다. /조선DB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때 업무개시명령 발동…정부 "취약계층 생계 우려" 설명

ILO 29호 협약은 2022년 11~12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가 총파업(집단운송거부)을 벌였을 때에도 언급됐다. 당시 정부는 시멘트·철강·석유화학 분야 운송 화물차주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공공운수노조는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발동을 앞두고 ILO에 긴급 개입을 요청했다. 당시 노동계는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은 결사의 자유에 관한 ILO 87호 협약과 강제노동에 관한 29호 협약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ILO는 1년 4개월 만인 지난 13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50차 이사회에서 ILO 결사의자유위원회(결사위)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결사위는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자영업 근로자(self-employed workers)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가 그들의 이익을 증진할 목적으로 결사의 자유 및 단체교섭의 원칙을 충분히 누리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또 "집단운송거부 참가자들에 대해 단지 업무개시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이번 결사위 권고는 업무개시명령 자체가 ILO 협약 위반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업무개시명령 발동이 강제 노동에 해당한다는 노동계 주장에 대해서는 "화물연대 집단운송 거부로 시멘트·원유 운송 차질로 건설 일용직 일자리, 동절기 난방, 무주택 서민의 주거권·건강권 위협이 우려되었다"며 "취약계층 생계 위협을 최소화하려 매우 제한적으로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했다. ILO 29호 협약에서 규정한 강제 노동의 예외 요건에 해당했다는 설명이다.

2019년 3월 27일 서울 용산구의 4차선 도로변에서 배출가스 단속이 진행되고 있다. 단속 대상이 된 1t트럭이 단속반 지시에 따라 공회전을 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을 서울시 소속 사회복무요원이 지켜보고 있다. /조선DB

◇ILO, 비군사적 성격의 병역 복무는 강제노동이라고 판단

입영판정검사에서 신체등급 4등급을 받은 남성은 과거 사회복무요원으로만 복무해야 했지만, 2021년 10월부터는 본인이 원하면 현역병으로 입대할 수 있게 됐다. 국회가 2021년 ILO 29호 협약을 비준한 데 따라 사회복무요원이 강제 노동에 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고용부에 따르면 ILO는 군사적 성격의 병역 의무 이행은 강제 노동으로 보지 않지만, '비군사적 성격'의 병역 복무는 원칙적으로 강제 노동으로 보고 금지한다. 다만 비군사적 복무라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면 강제 노동으로 보지 않는다. 산업기능요원, 공익법무관, 공중보건의 등은 군사적 복무 대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서 문제가 없으나, 사회복무요원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강제 노동에 해당할 수 있었다.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일부 사회복무요원들은 2022년 비인가 노조를 결성하고, 현 제도는 ILO 29호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며 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이들은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방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병무청 마스코트인 '굳건이'가 그려진 현수막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