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근로시간과 관련해 노동 현장에서 적용돼 온 해석을 깨는 판결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지금까지와 달리 판단한 것인데, 이 판결대로라면 이론적으로는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연속 근무를 이틀 연달아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게 아니다.
노동계는 "현장에서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며 반발했다. 정부는 "판결을 존중한다"면서 현장 혼선이 없도록 행정해석을 조속히 변경하겠다는 입장이다. 올해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아 정부가 한발 물러선 '주 69시간 근무제'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근로기준법에 연장근로 판단할 기준 없어…대법원 새로운 해석 내놓아
26일 법조계와 노동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준수했는지 따질 때는 '1일 8시간' 초과분을 각각 더하는 게 아니라, 주간 근무시간을 모두 더해서 52시간을 초과했는지 계산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단은 연장근로 한도를 총 130회 초과해 일하게 하는 등 근로기준법·근로자퇴직급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사업주 이모씨 혐의를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면서 나왔다.
초과 근로시간을 계산할 때 기존 방식으로는 근로자가 하루에 8시간을 초과해 일한 시간을 더해 일주일에 12시간 넘게 일했는지 따졌다. 가상의 근로자 A씨가 일주일 중 이틀은 15시간, 사흘은 6시간 일했다면 기존 방식으로는 14시간(7시간씩 이틀) 초과근무한 것이어서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법원이 제시한 새로운 방식에 따르면 A씨는 일주일간 총 48시간 일했고, 52시간 이내이므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게 아니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은 연장근로시간의 한도를 1주간을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고 1일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다"면서 이같이 판단했다. 근로기준법상 연장근로 기준은 '1일'이 아니라 '1주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이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주 40시간, 1일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당사자간 합의하면 1주 12시간 한도에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에 관련 조항은 불분명하게 되어 있다.
근로기준법 제50조에는 '1주 40시간, 1일 8시간'을 규정하고 있지만 연장근로와 관련한 제53조에는 한도가 '1주간 12시간'이라고 되어 있다. 제56조에는 연장근로수당의 기준으로는 휴일의 경우에만 '1일 8시간'을 제시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를 근거로 '1일 8시간'을 초과 근로시간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근로기준법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이면 30분 이상, 8시간이면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도록 되어 있다. 대법원 판단대로면 근로자는 하루 24시간 중 휴게시간을 제외한 21시간30분을 연속으로 일할 수 있다. 이렇게 이틀을 일하면 근로시간은 총 43시간으로,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존 해석대로면 연장근로시간 한도보다 15시간 더 일해 불법이었다.
◇'주 30시간' 근로계약한 직원 35시간 일하면 수당은? 해석 논란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정부가 올해 3월 발표했던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과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당시 정부는 주당 52시간 근무제 틀은 유지하면서, 일주일에 12시간인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월·분기·반기·연'으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일이 몰릴 때 몰아서 일하고, 없을 때는 장기 휴가를 떠나도록 해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방안에서 근로자가 일주일에 일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69시간이었다.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는 경우가 해당한다.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은 주 64시간으로 상한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주 69시간제' 논란이 일자 정부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정부는 8개월 만인 지난달 "주 52시간제 틀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업종·직종에 한해 노사가 원하는 경우' 연장근로 단위에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이 몰리더라도 '주 60시간' 등 상한을 설정하고,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해 근로자 건강이 훼손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은 11시간 연속 휴식이나 1일 근로시간과 관계 없이 일주일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었는지만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박사영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은 대법원 판결은 11시간 연속 휴식 같은 휴식시간이 없어도 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일주일에 30시간 일하기로 계약한 근로자가 35시간 일했다면 기존에는 5시간 만큼 연장근로수당을 줘야 하지만, 이번 판결에 따르면 법정 근로시간인 40시간 이내이므로 주지 않아도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박 부회장은 "이번 판결로 실무가 혼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노동 현장에서는 유연근무제 도입 없이도 충분한 휴식 없이 연속 밤샘 근무가 가능해졌다"며 "판결대로라면 24시간 일하고 3~4시간 휴식 후 다시 24시간 일해도 주당 48시간만 일한 것이므로 (근로시간이 한도인 주) 52시간 미만이 돼 아무 문제가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고용부 "산업 현장 어려움 고민한 판결" 한국노총 "시대착오적"
고용노동부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그간 행정해석으로만 규율됐던 연장근로시간 한도를 어떻게 적용할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라며 "경직적인 근로시간 제도로 인한 산업 현장의 어려움을 심도 깊게 고민해 도출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바쁠 때 더 일하고 덜 바쁠 때 충분히 쉴 수 있도록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인 판결"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혁 방향과 궤를 같이한다고 본 셈이다. 고용부는 현장에서 혼선이 없도록 조속히 행정해석을 변경할 계획이다.
노동계는 대법원 판결에 반발하며 근로자의 건강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노총은 전날 논평에서 "이번 판결은 그동안 현장에 자리잡은 연장근로수당 산정 방식과 배치되는 것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쓸데없는 혼란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일 연장근로 상한 제한과 24시간 중 11시간 연속 휴식권 전면 보장이 필요하다"며 "국회는 입법 보완에 즉시 나서라"고 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에서 "대법원 판결 이후 고용노동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노동시간 유연화를 들고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일 노동시간 상한 규정'과 '11시간 연속 휴식제'를 실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