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금요일 오후 6시에서 오후 10시 사이에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 하겠습니다."
3일 저녁 익명 기반의 소셜미디어(SNS) 텔레그램에서 식칼 사진 위에 살인을 예고하는 글이 적힌 이미지 하나가 삽시간에 퍼졌다. 경기 분당구 서현역에서 14명의 피해자를 낸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진 직후여서 이미지가 확산되는 속도는 그 어느때보다 빨랐고 시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경찰은 최초 글 작성자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고, 오리역과 서현역 일대에 기동대와 순찰차를 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경기 분당구 서현역 등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장소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진 후 온라인에 연이어 살인 예고 글이 올라왔다. 이 같은 글 작성자에게는 사안에 따라 살인예비, 협박 등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데 대상이 특정되거나 협박 내용에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 장난으로 판명되면 처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도에 상관없이 살인 예고 글을 올리는 것 만으로 경찰력이 동원되고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만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흉기 준비하고 대상 특정됐다면 살인예비 혐의 적용 가능
4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서울 지하철 신림역에서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예고글 중 2건을 검거했다. 검거된 피의자 1명은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 이후인 지난달 24일 처음으로 살인 예고글을 올린 20대 남성이다.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수요일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과 함께 온라인에서 흉기를 구매한 화면을 캡처해 올린 뒤 자수해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같은달 25일 "신림역 일대에서 여성을 강간·살인하겠다"는 게시물을 올린 피의자도 검거됐다. 3일에는 텔레그램, 디시인사이드 등에 서울 잠실역과 경기 오리역, 서현역 등에서 범행을 또 저지르겠다는 예고 글이 공유됐다.
살인 예고글을 올리는 경우 게시글 내용이나 범죄 정황 포착 여부 등 사안에 따라 ▲경범죄처벌법 위반부터 ▲협박 ▲위계공무집행 방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위반 ▲살인예비 등 다양한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경찰은 우선 글 게시자들에게 협박 혐의를 적용했다. 수사를 통해 구체적인 범죄 준비를 했는지 등을 추가 확인해 또 다른 혐의 적용을 검토할 계획이다. 협박 혐의가 인정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살인 예고 글을 올린 사람이 흉기를 구매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면 실제 범행하지 않았어도 살인예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지난 6월 인터넷에 '살인예고'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식칼을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평소에 잘하든가 XXX들이"라고 쓴 C씨에게 존속살인예비 혐의를 인정했다. C씨는 실제 오토바이에 부엌칼을 넣은 뒤 피해자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D씨가 일하고 있는 한 편의점까지 갔으나 범행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재판부는 "수년간 앓고 있는 조현병이 범행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며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조계에선 살인 예고글을 올리며 흉기구매를 인증하는 것도 살인예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법무법인 호암의 신민영 변호사는 "단순히 살인 예고글을 올린 것만으로 살인예비를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흉기 구매를 인증한 경우에는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테러방지법 적용 가능성에 대해선 "국제연합(UN)에서 정한 테러단체에 가입하거나 연동된 경우여서 개인이 올린 글로는 처벌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 단순 장난으로 판명되면 협박죄 인정 여부도 불투명
단순 장난으로 글을 올렸거나 범행 대상이 특정되지 않는다면 수사기관이 협박 혐의를 적용할 수는 있어도 법원에서 인정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검사 출신으로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법을 강의하는 이창현 교수는 "협박죄는 일반적으로 특정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적용했었다"며 "살인을 예고한 사람이 재판 과정에서 살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유사한 사례가 있더라도 이전까지는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행위로 처벌했을 것"이라며 "비슷한 선례도 없는 것으로 알아 대법원에서 어떤 판단을 할지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하진규 법률사무소 파운더스 대표변호사도 "협박죄는 구체적인 해악의 고지가 있어야 하는데, 구체성과 관련해 법정에서 다툼이 있을 것 같다"며 "누가 협박을 당했는지도 애매하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협박을 했다는 건 애매하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2014년 9월 "오늘 밤 8시 기장에서 칼로 30명 죽이고, 송정해수욕장에서 50명 죽일 것이다" "여중생·여고생들을 죽일 거다" 등 살인 예고글을 13회에 걸쳐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A씨에 대해 협박죄가 아닌 위계공무집행방해와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A씨가 게시한 살인 예고글을 진짜라고 생각한 게시판 운영자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경력 200명을 동원해 밤새 수색하도록 만들어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결국 A씨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 교수는 "위계공무집행방해는 행위자가 장난이나 거짓으로 했다는 것이 확정되고, 글 게시자가 여러번 글을 올려 수 차례 경찰이 투입됐으면 적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검찰은 2020년 6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20대 여성 BJ가 운영하는 카페에 불을 질러서 화형시키고 싶다" 등 게시물을 16차례에 걸쳐 올린 B씨에 대해 모욕과 협박죄를 적용했다. 피해자가 특정됐단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B씨가 여성 BJ 어머니를 살해하기 위해 흉기를 소지한 채 주변을 배회한 혐의(살인예비 등)까지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 "국민들 불안하게 했다면 어떻게든 수사·기소해야"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살인 예고글을 강력 처벌해 향후 비슷한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승재현 한국형사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장 법적으로 협박죄가 인정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 "국민들을 불안에 빠지게 했다면 어떻게든 수사하고 기소해서 (유죄를 이끌어) 대법원 판례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당분간 살인 예고글을 올린 사람들에 대해 살인예비죄를 적용하는 등 엄격하게 혐의를 적용하는 게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며 "구체적으로 흉기 사진도 올리는 것은 살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