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한 ‘만 나이 통일법(출생일을 기준으로 0살부터 시작해 1년이 지나면 1살씩 늘어나는 계산법)’이 28일 시행 첫날을 맞았다. 술·담배 등 청소년 유해 품목 구입, 병역 의무 이행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행정·민사상 나이는 앞으로 모두 만 나이로 쓴다. 출생일부터 한 살 먹은 것으로 계산하는 이른바 ‘세는 나이’를 기반으로 한 한국식 관계 맺기에 일대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그간 우리나라에선 ▲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 세 가지 나이 계산법을 혼용해 왔다. ‘세는 나이’ 기준으로는 출생일부터 한 살로 계산해 다음 해 1월 1일부터 한 살씩 증가한다. 12월 31일에 태어난 아이가 그다음 해 1월 1일에 2살이 되는 한국만의 독특한 나이 계산법이다. ‘연 나이’는 올해에서 출생 연도를 빼는 방식이다. 보통 세는 나이보다 1살 적게 계산된다.

현행법상 나이는 민법에 따라 ‘만 나이’로 계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세금·의료·복지는 만 나이를 기준으로 적용하고, 청소년보호법과 병역법 등 일부에선 ‘연 나이’를 사용해 왔다. 이에 더해 일상에선 대부분이 ‘만 나이’와 최대 2살 차이 나는 ‘세는 나이’를 쓰고 있어 혼란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만 나이 통일법 시행에 따라 정부는 현재 법령상 연 나이 셈법을 사용 중인 제도 중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만 나이 셈법을 쓰도록 바꿔나간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중장기적으로 ‘한국식 서열문화’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두 살 차이도 엄격하게 나눠 연장자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높임말을 써야 하는 등의 한국식 서열문화는 태어난 연도로 전 국민이 동일하게 나이를 먹는 ‘세는 나이’에 의해 강화되는 측면이 있어서다.

만 나이 통일법 시행을 하루 앞둔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청에 법 시행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연합뉴스

◇ 젊어진 대한민국… 취학·병역 연령은 그대로

만 나이 도입으로 정부는 그동안 나이 기준 혼용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발생했던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만 나이를 사용하는 만큼 국제적인 기준에 맞춰서 나이를 사용하는 것이 해외 업무 등에서도 효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계속 연 나이를 쓰는 예외도 있어 혼선을 주의해야 한다. 취학연령, 주류·담배 구매, 병역 의무, 공무원 시험 응시 등이 대표적이다. 형평성을 위한 조치다. 우선 초등학교는 기존대로 초·중등교육법에 따라 만 나이로 6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 3월 1일에 일괄적으로 입학한다. 같은 해에 태어났으면 같은 해에 입학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올해 기준으로는 생일과 관계 없이 2016년생이, 내년에는 2017년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만 나이 통일법 시행을 하루 앞둔 27일 오전 한 시민이 서울 시내 한 편의점에 계산대에 19세 미만 술·담배 구매 불가 안내문이 붙어있다. 여성가족부는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돼도 청소년보호법상의 청소년 연령은 현행처럼 '연 나이'(현재 연도에서 출생 연도를 뺀 나이)가 기준이므로 술·담배 구매 가능 연령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술·담배를 사거나 청소년 유해업소를 출입할 수 있는 나이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를 정하는 청소년보호법에서 청소년 연령 기준이 연 나이여서다. 청소년보호법상 청소년 연령을 연 나이로 규정한 것은 사회 통념상 성인으로 여겨지는 이들의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청소년 출입 금지 업소 출입 등은 지금처럼 연 나이로 19세 미만은 불가하다.

병역 의무도 기존과 마찬가지로 연 나이를 적용한다. 병역법에는 병역의무자로 등재되는 나이(18세)와 검사 시행 나이(19세)를 ‘그 연령이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라고 별도로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올해를 기준으로 2004년생이, 내년에는 2005년생이 병역 판정 검사를 받게 된다.

◇시민들은 환영 “어려지니 기회 생긴 거 같아”… 학교에서도 “형 아닌 친구”

만 나이 시행 첫날, 시민 대부분은 환영한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한국 사회에선 나이 ‘앞 자리 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20대가 된 30대, 30대가 된 40대 등은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달라진 나이를 인증하며 기쁨을 표출했다.

취업준비생들은 신입 채용 나이 마지노선도 완화되기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취준생 이 모(29) 씨는 “한국식 나이로는 31살 장수 취준생인데, 갑자기 나이가 29살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기회가 더 생기는 거 같다”면서 “가뜩이나 한국은 나이에 엄격하고, 20대 때 자리를 못 잡으면 실패자라고 생각하는데 전 국민이 다 같이 어려진 거지만 그래도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다만 초·중·고등학교처럼 세는 나이를 기준으로 학년을 구분해 온 현장에서는 혼선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당장 같은 학년 구성원들 나이가 1~2살씩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 이 모(34) 씨는 “아이들에게 꾸준히 교육을 해왔지만 갑자기 서로 나이가 달라지니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면서 “다만 한두 살 차이가 나도 원래 친구였으니 아이들이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법제처에서는 친구끼리 나이가 달라져도 호칭을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식 서열문화 완화될까?… 전문가들 진단은 엇갈려

6일 1일 오전 대전시 서구 둔산동 둔산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발표수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만 나이 도입이 한국식 서열문화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법제처가 작년 9월 만 나이 도입을 시행하기 전에 국민신문고를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총 6394명 참여)에서도 응답자들은 ‘만 나이 통일’을 찬성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기존 한국식 나이 계산법으로 인한 서열문화 타파 기대’를 꼽았다.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한국식 서열문화는 전통적인 유교가 아닌 일제강점기 시대 교육제도의 잔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군국주의 문화에 따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 호칭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선비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학문을 중시했던 선비들은 나이와 상관 없이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면 친구를 맺었다. 우정의 대명사인 오성과 한음은 5살 차이였고,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의 대표격인 다산 정약용도 ‘위아래 4살 차이는 서로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문가들은 만 나이 도입에 대한 혼선은 적을 것으로 봤다. 이미 행정 도입이 된 지 오래됐고 기업이나 조직 문화가 수평화되고 있어 거부감이 적다는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에서도 서열에 따라 명칭을 다르게 하는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반적인 사회 변화, 기업 문화 변화와 맞물려 만 나이가 (사회적 나이로) 연착륙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이에 따른 서열문화 변화의 정도에 대해서는 엇갈린 진단을 내놓았다. 한 두살 차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문화가 정착하면서 한국식 서열문화에 중장기적으로 균열이 올 수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아니라도 학번이나 학년, 기수 등의 구분을 통해 한국의 서열문화는 공고히 유지될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나온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기존에는 한 살 차이로도 첨예하게 위아래를 가르던 사회였는데, 학교에서부터 한두 살 차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기존의 서열문화가 완화될 수밖에 없다”며 “서열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완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반면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만 나이 도입은 행정상의 편의에 불과하다”며 “한국의 엄격한 서열주의를 약화시키긴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나이로 나누기 애매해지면 학년이나 학번으로 따질 것”이라며 “일제 시대와 군사독재 시대를 거쳐 군사주의 문화의 잔재가 아직 확고히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단순히 만 나이를 도입한다고 해서 서열주의가 구조적으로 없어지기가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