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결혼과 단순한 동거 사이의 ‘사실혼’ 관계를 법제화한 ‘시민연대계약(PACS·pacte civil de solidarité)’이라는 형태의 가족 형태가 있다. 이 제도를 이용하면 결혼을 하지 않은 동거 커플도 정부로부터 세제 혜택 등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국에서는 ‘저출산 대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에는 비슷한 내용의 법안도 국회에 발의됐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PACS 계약이 시행 20여년을 맞으면서, 출산율을 높인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분석 결과가 최근 나왔다. 또 PACS 계약으로 맺어진 커플도 갈라설 때에는 절차가 간단하다는 것 이외에는 재산을 분할해야 하는 등 결혼과 비슷한 점도 많다. 이런 점 때문에 PACS 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하는 커플도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수아 올랑드(왼쪽) 전 프랑스 대통령과 전 동거녀 발레리 트리에르바밀레. 트리에르바밀레는 올랑드 전 대통령과 PACS 계약을 맺은 '퍼스트 걸프렌드'였다. 올랑드 전 대통령은 임기 중 PACS 관계를 해소했다. /조선DB

◇프랑스 PACS와 비슷한 생활동반자법, 첫 발의…야권선 ‘공감대’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지난달 26일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생활동반자법)을 발의했다. 생활을 함께하는 동반자에게 동거 및 부양·협조 의무, 일상가사대리권,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 책임 등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서로에게 부여하는 내용이다. 생활동반자는 신혼부부처럼 주택 정책을 수립할 때 고려 대상이 되며, 국민연금·고용보험 연금 수급, 건강보험 피부양, 출산휴가·돌봄휴가 등의 권리도 가질 수 있다.

생활동반자법이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떨어질 정도로 저출산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용 의원은 “독일·덴마크·스웨덴 등 출산율이 높은 선진국들은 이미 다양한 가족을 법 제도로 인정하고 있다”며 “혼인 외 가족 구성과 출산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마주한 저출산·인구위기 대응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2021년 출생아 중 혼외 출산 비율이 62.2%를 기록했다.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2.9%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다만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응답자가 34.7%에 달한다. 10년 전에는 이 비율이 22.4%였다. 이 때문에 생활동반자법이 출산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프랑스의 PACS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법안이 국회에 발의된 것은 처음이지만, 야권에서는 법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돼 왔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대선 당시 ‘시민동반자법’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박홍근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올해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생활동반자 제도 도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라고 밝혔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3개월 아들과 함께 어린이날 맞이 노키즈존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PACS, 헤어지는 건 이혼보다 쉽지만 재산은 분할해야…한국 법안에도 반영

생활동반자법은 프랑스의 PACS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PACS 계약을 맺은 당사자에게는 동거 의무가 부과되고, 어느 일방이 동거 의무를 불이행한 경우 상대방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또 부양과 상호 부조 의무가 인정된다. 혼인한 부부 사이와 동일하게 당사자 간 성실 의무가 인정된다.

또 각 당사자에게는 물질적인 협조 의무도 부과된다. PACS 계약 당사자가 호적 담당 공무원에게 제출하는 협의서에는 각자가 부담할 일상 가사 비용 금액이나 재무와 관련된 내용, 재산의 공동 부분에 관할 결정 등의 세부적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동거계약 기간 중 각자의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단독 소유가 되지만,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지 못하면 그 재산은 공유로 추정된다.

PACS 계약 해소도 이혼과 동일하게 당사자 일방의 해지 의사에 따라 종료될 수 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PACS 당사자가 헤어지더라도 법적인 기록이 남지 않고, 이혼과 갈리 법정에 출석하는 번거로운 일도 없다. PACR 계약이 해소될 때 각 당사자가 배타적 소유권을 증명하지 못한 재산은 2분의 1씩 권리가 인정된다. PACS 해소 원인이 일방의 폭력에 있을 경우, 상대방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용 의원의 생활동반자법은 두 당사자가 합의에 따라 생활동반자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고, 해소는 쌍방 합의하거나 일방이 원하는 경우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사자 한 명이 다른 사람과 혼인한 경우에도 관계가 해소된다. 이혼보다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셈이다. 또 생활동반자관계가 해소된 경우 재산분할 청구권을 인정했다. 해소에 어느 한 사람의 과실이 있는 경우, 손해 배상도 청구할 수 있다.

라시다 다티 전 프랑스 법무장관이 2008년 9월 12일(현지 시각) 파리 엘리제궁을 나서고 있다. 미혼인 다티 장관은 이 사진에서 임신한 상태다. /조선DB

◇PACS 관계에서 비혼부와 자녀 친생자 추정 원칙 적용 안 돼…’인지 절차’ 필요

PACS 제도는 프랑스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8년에는 혼인 신고와 PACS 신고 비율이 2대 1이었고, 2010년에는 4대 3이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1대1 수준이 됐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프랑스에서 혼인 신고는 22만4443건 PACS 신고는 19만6370건으로 혼인이 14.3% 더 많았지만, 코로나19 이후인 2020년에는 혼인 신고는 15만4581건, PACS 신고는 17만3894건으로 혼인이 11.1% 더 적었다.

그러나 PACS 제도 때문에 프랑스에서 과거보다 더 많은 아이를 낳게 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파리1대학(팡테옹-소르본)에서 법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준혁 박사는 지난해 1월 발표한 PACS 관련 논문에서 “PACS가 출산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은 완전히 빗나간 것을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박 박사가 프랑스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18~39세 PACS를 맺은 당사자들의 46%가 자녀가 없었지만, 혼인 관계인 부부는 15%만 자녀가 없었고, 85%는 자녀가 있었다. 동거 관계에 있다고 해서 PACS 신고를 잘 하지도 않는다. 2011년 18~39세의 실제 동거하고 있는 커플 중 PACS를 맺어 신고한 비율은 3%밖에 되지 않는다.

PACS로 맺어진 커플은 혼인과 달리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비혼부)와 친생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친생자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녀의 친권(親權)을 가지려면 친자관계존부확인의 소나 임의인지 등 인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송민영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16년 프랑스 PACS를 분석한 자료에서 “프랑스의 PACS는 밑에서부터 분출된 사회적 욕구에 국가가 적절히 대응한 것”이라며 “사적 영역에 국가가 개입하여 출산율을 올리려는 목적에서 도입된 제도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프랑수아 올랑드(왼쪽) 전 프랑스 대통령은 세골렌 루아얄(오른쪽) 전 환경장관과 30년 가까이 동거하며 자녀 넷을 낳았다. /조선DB

◇프랑스, 사회 지도층도 결혼·PACS 관계 아닌 상태에서 혼외자 출산

실제로 PACS 커플이 아닌데도 혼외 관계에서 자녀를 출산하는 경우도 꽤 많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취임 다섯 달 만에 두 번째 아내인 모델 출신 세실리아와 이혼하고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수퍼모델 겸 가수 카를라 브루니와 결혼했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과 브루니 여사는 엘리제궁에서 딸을 낳았고, 사르코지는 재임 기간(2007~2012년) 중 이혼한 뒤 재혼해 자식을 낳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법무장관으로 발탁한 아프리카 빈민 가정 출신 라시다 다티 변호사와 염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미혼이었던 다티 장관은 재임 기간 중 딸을 낳았다. 한때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프랑스 연예 전문 주간지가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이 PACS 계약을 맺고 동거 중인 상태에서 여배우 쥘리 가예와 엘리제궁에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조선DB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재임 2012~2017년)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국립행정학교(ENA) 동창생인 세골렌 루아얄 전 환경장관과 197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가까이 동거하며 4명의 자녀를 뒀다. 올랑드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되자, 다음 동거녀인 발레리 트레이르바일레가 ‘퍼스트 걸프렌드’가 됐다. 올랑드 전 대통령과 트레이르바일레는 PACS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런데 올랑드 전 대통령은 취임 1년 7개월 만인 2014년 1월 여배우 쥘리 가예와 염문설이 제기됐다. 당시 연예 전문 주간지는 올랑드 전 대통령이 수시로 오토바이를 타고 엘리제궁에서 나와 가예의 집으로 가 밤을 새우고 돌아온다고 보도했다. 올랑드 전 대통령은 염문설이 나온 지 8년 만인 지난해 6월 가예와 결혼했다. 공식적인 부부 관계를 맺은 것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