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 학교 폭력’으로 낙마한 고위 공직자 1호라는 불명예를 얻게 됐다. 학교 폭력이 부동산, 병역, 입시 문제와 함께 또 하나의 국민 역린이 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향후 고위공직자 임명 시 본인이나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도 검증대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7일 경찰에 따르면 검찰 재직 당시 ‘특수통’으로 꼽혔던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 학교폭력 논란이 불거지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지 하루 만인 지난 25일 사퇴했다. 정 변호사는 “아들 문제로 국민들이 걱정하는 상황이 생겼다”며 “이러한 흠결을 가지고서는 국수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정 변호사가 사의를 표명한 것은 자녀의 학교 폭력 가해 사실을 감추고 국가수사본부장에 오르려고 했던 처신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피해자에게 사과하기는커녕 당시 검사이자 가해자 아버지였던 정 변호사가 직접 나서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송까지 제기했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15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형사 제5부 정순신 부장검사가 탈북일가족을 다시 납북시킨 전 북한 보위부 공작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조선DB

◇ 정순신, ‘언어폭력’ 저지른 子 소송 통해 전학 미뤄... “더글로리 현실판”

정 변호사 아들은 2017년 자립형사립고에 재학할 당시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급생에게 8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온 돼지” “빨갱이” “사료나 먹어야 한다” 등 언어폭력을 가했다. 정 변호사 아들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재심과 재재심을 거쳐 전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정 변호사 측은 전학 처분이 부당하다며 2018년 7월 춘천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대리인은 정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판사 출신 변호사가 맡았다. 피해자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한 상황이었으나 정 변호사 측은 재판에서 ‘단순히 별명을 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에서 인권감독관을 지내고 있던 정 변호사가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법조계 인맥을 동원해 ‘2차 가해’를 저지른 셈이다.

1심 재판부는 정 변호사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변호사 측은 항소했으나 패소했고, 상고심 역시 결과는 같았다. 소송 기간이 길어지면서 정 변호사 아들은 전학 처분이 결정된 시점으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19년 2월에서야 학교를 옮겼다. 이 기간 동안 피해자는 가해자와 함께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피해자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정 변호사 아들은 2020년 정시모집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당시 서울대 정시모집에서는 체육교육학과를 제외한 모든 신입생을 수능 100%로 선발해 학교폭력 전력이 입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선 ‘더글로리 현실판’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더글로리는 학창시절 학교폭력을 당한 학생이 성인이 된 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주인공인 ‘동은’은 학교에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정 변호사와 같은 소위 ‘권력을 가진 부모들’ 압박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순신 판 ‘더 글로리’의 현실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불공정했다”며 “아들의 학폭 사태 당시 검찰 고위직이던 아버지가 부당하게 개입했는지, 학폭 전력에도 어떻게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넷플릭스 더글로리 파트2 포스터./뉴스1

◇ 학폭 피해 다룬 콘텐츠에 경각심↑...‘공정’ 중시하는 10~30대 불편하게 느껴

전통적인 ‘국민 역린’은 병역 비리와 부동산 투기, 음주 운전 등이었다. 가수 유승준이 200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병역을 기피하면서 국민적 공분이 일자 병역기피가 고위공직자 검증의 주요 잣대로 급부상했다. 가정환경이 어렵거나 신체적 문제가 있지 않은데도 국적 선택을 통해 병역을 면제받거나 고위 공직자인 부모 연줄을 활용해 상대적으로 쉬운 임무를 부여 받는 사례가 발각되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부익부 빈익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부동산 투기 여부가 고위 공직자 청문회 단골 소재가 됐다. 자산을 불리기 위해 부동산 차명 거래를 하거나, 자녀를 좋은 학군에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을 한 사례 등이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나 망신을 당하고 자진 사임한 고위 공직자들이 잇따랐다. 문재인 정부는 고위공직자 검증 과정에서 병역기피·위장전입·음주운전 등을 ‘7대 비리’가 발견될 경우 임용을 원천 배제하기로 했다.

반면 학교폭력은 연예인·운동선수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이유는 됐어도 그 화살이 고위 공직자들에게까지 미치진 않았다. 학교폭력은 ‘아이들끼리 싸우다 발생한 것’이라거나 ‘원래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 또는 ‘피해자도 잘못한 게 있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고위 공직자의 직(職) 수행 능력과 도덕성 검증 잣대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

박옥식 청소년폭력연구소장은 “과거에는 학교폭력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며 “학교폭력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많아지면서 사회적 문제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학교 폭력이 크게 줄지 않고 오히려 수위가 높아지는 가운데 피해자의 삶을 조명한 영화와 드라마, 방송 등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며 국민들의 경각심도 높아졌다. 불공정에 민감한 지금의 10~30대에게 학교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좋은 집안 뒤에 숨어 떵떵 거리며 살아가는 가해자와 평생 고통 받는 피해자를 방치하는 것은 문제라는 시각이 확산됐다. 조국 전 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문제에 가장 분노한 것도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세대)였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퇴진·김건희 여사 특검 촉구 촛불승리전환행동 집회에서 한 시민이 아들 학교 폭력 논란에 휩싸인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국가수사본부장에 내정된 정 변호사는 아들 학폭 논란으로 임명 하루 만인 이날 사퇴했다. /뉴스1.

◇ 향후 고위 공직자 선발 때 학폭 여부도 살피나... “포괄적으로 고려돼야”

일각에서는 향후 고위공직자를 선발할 때 본인 또는 자녀에게 학교폭력 문제가 있었는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정하지 못한 절차를 거치거나 권력을 사유화했는지 등도 들여다봐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법무부 청소년범죄예방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훈 부산외대 특임교수는 “학교에서부터 기득권이 답습되고 서열화가 진행된다는 인식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러한 국민들 눈높이에 맞춰 학교폭력도 고위공직자 임사검증 과정에서 포괄적으로 고려돼야 할 부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은 ‘재발방지 차원에서 고위공직자들의 학교 폭력 문제도 검증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어야 했다”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문제로 자녀 입시비리에 대한 국민들 관심도가 높아졌던 것처럼 이번 사건으로 공직자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도 계속해서 이슈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소장도 “정 변호사의 경우 사실관계를 왜곡시키고 피해자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많은 공분을 샀던 것”이라며 “사회적으로 학교폭력이 중요한 부분이 된 만큼 고위공직자 선정 과정에서도 소홀히 하지 않고 다뤄줘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다만 고위공직자 검증 과정에서 학교폭력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체계는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학교폭력 문제를 검증하려면 생활기록부를 봐야 하는데, 공직후보자 등에 관한 정보의 수집 및 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이 임명·위촉하는 직위 후보자의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에 대한 정보 수집 범위는 성명·나이·주민등록번호 등에 한정돼 있다. 자녀 학적이나 병역기록, 범죄기록 등은 확인하지만 생활기록부까지는 보지 않는 것이다.

정 변호사 검증 과정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 변호사는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이 제시한 사전질문지 중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 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이 있습니까’라는 문항에 ‘아니오’라고 기재했다. 본인 또는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를 숨겨도 공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셈이다.

대통령실은 전날 정 변호사 임명 취소와 관련해 “공직자 검증은 공개된 정보, 합법적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 세평 조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며 “공직 후보자 본인이 아닌 자녀와 관련된 문제다 보니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합법적 범위 내에서 한계를 개선할 방안이 있는지 잘 찾아보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