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한 협동조합 직원들이 해외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른바 ‘2차’를 하겠다는 사람들을 메모하고 각각 돈을 걷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해당 주장과 관련된 메모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으나, 누군가 메모를 지우기 위해 볼펜으로 글자를 까맣게 칠해버려 어떤 내용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경찰은 해당 메모에 대한 문서 위·변조 감정에 나섰다. 그 결과 볼펜으로 덧칠해져 보이지 않던 메모는 사람 인원으로 추정되는 숫자와 현금 액수로 보이는 숫자를 곱한 수식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성매매 비용을 사람 수대로 곱해 계산했다는 의심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성매매를 원하는 사람들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는 진술에 신빙성을 더해줘 추가 수사 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위·변조 감정이 없었다면, 경찰이 확보한 메모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질 수 있었던 셈이다.

도말(塗抹)된 글자. 도말이란 특정 문서에 쓰인 글자를 지우기 위해 볼펜으로 글자를 덧칠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범죄 정황이 드러날 수 있는 메모를 지우기 위해 이용된다./경찰청

경찰이 문서 위·변조 감정을 수사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비해선 걸음마 단계지만, 경찰은 전문인력 확충 등 인프라가 개선되면 수사 효율성이 제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3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작년 12월 한국인증기구(KOLAS)로부터 문서·인영(도장) 감정 방법에 대한 국제공인시험기관으로 인정받았다. 2018년 문서 위·변조 감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5년 만이다. 경찰이 작년 한 해 동안 수행한 문서 위·변조 감정은 139건이다.

◇ 볼펜마다 잉크 성분 제각각… 메모 덧칠해 지워도 투시 가능

경찰이 주력하는 감정 분야 중 하나는 필기구 동일성 감정이다. 계약서·메모장·차용증 등 문서를 작성할 당시 쓰인 필기구가 현재 존재하는 필기구와 유사한지 등을 파악하는 분야다.

필기구 동일성 감정은 같은 볼펜이라도 제조사마다 잉크 성분이 다르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특정 제품의 잉크는 형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글자에 자외선·적외선을 쏘면 형광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형광반응을 보이지 않는 잉크로 만들어진 볼펜도 있다. 형광반응을 보이는 볼펜으로 차용증을 쓴 뒤 누군가 형광반응이 없는 볼펜으로 수정·조작했다면 감정을 통해 어떤 부분이 변경됐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기자 이름을 적은 뒤 다른 볼펜으로 도말(塗抹)한 사진(왼쪽)과 이를 적외선·자외선으로 투시했을 때 모습(오른쪽). 적외선·자외선 투시 결과 기자 이름을 쓴 볼펜 잉크는 형광반응을 보였지만, 도말에 이용된 볼펜은 형광반응이 없어 본래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경찰청

경찰은 지난 2019년 지방의 모 대학병원의 채용비리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6명의 심사위원이 작성한 심사 결과지를 감정한 결과 ‘평가항목’에 쓰인 볼펜 종류와 서명란에 사용된 볼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평가 내용을 작성할 때 쓰인 잉크 성분과 서명을 할 때 사용된 잉크가 다르다는 것으로 심사 결과지가 다시 작성됐거나 서명을 대리로 했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기법은 도말(塗抹)된 글자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도 활용된다. 도말이란 범죄 정황이 드러날 수 있는 메모를 지우기 위해 볼펜으로 글자를 덧칠하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쓰여진 글자의 잉크와 도말에 사용된 잉크의 성분이 다를 경우 숨겨진 글자가 무엇인지 투시할 수 있는 셈이다.

◇ “사람 눈으론 파악하기 어려워”… 미세한 차이 잡아내는 인영 감정

도장 모양을 분석하는 인영 감정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적이 없다거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만들어 임의로 계약을 했다는 주장이 나올 경우 사실관계 파악에 활용된다.

도장은 어떤 기계에서 어떤 조건으로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도장의 크기·폰트·기울기·색깔 등이 모두 다르다. 특히 사용된 지 오래된 도장에는 마모된 흔적이 있을 수 있고, 글자가 부서져 탈락되는 경우도 있다. 인주에 따라 흡착되는 정도도 종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인영 감정에는 최소 2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문서실'이라고 적힌 두 개의 도장을 하나로 겹친 상태. 빨간색 도장과 청록색 도장을 비교하면 도장 크기와 글자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감정관들은 이를 정밀 분석해 계약서 등 특정 문서 작성 당시 찍힌 도장과 실제 존재하는 도장이 동일한지 여부를 판단한다./경찰청

인영 감정은 감정관이 직접 눈으로 대조해 차이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경찰청에서 문서 위·변조 감정을 하고 있는 최영호 경장은 “같은 ‘8푼(가로·세로 2.4cm, 높이 8cm)’ 크기의 도장이라고 해도 미세하게 크기가 다르다”며 “같아 보이겠지만 다를 수 있다는 의심이 해소될 때까지 분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건과 관련된 현물 도장이 오면 직접 찍어보고 비교·대조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14만명 중 감정 인력은 3명… 필적감정은 시작도 못해

경찰의 문서 위·변조 감정은 2018년부터 시작됐다. 검찰에서 문서 감정에 대한 교육과 실무를 접했던 최영호 경장이 경력경쟁채용을 통해 경찰로 들어온 뒤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재 감정관은 14만 경찰 조직 중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인프라는 제자리 걸음이다. 문서 위·변조 분야에 대한 수십년 역사가 쌓인 검찰이나 국과수와 비교했을 때는 한참 뒤처지는 셈이다. 더구나 문서 위·변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자리잡지 못한 상태로 경험이 풍부한 선임 감정관이 후배 감정관과 함께 일하며 도제식 교육을 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다.

특히 문서 위·변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필적감정은 경찰 내부에 전문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시작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경찰은 향후 연구직 채용, 국내 대학과 연계한 위탁교육 과정 개설, 경찰수사연수원에 전문교육이 가능한 교육센터 설치 등 인적 전문성 향상 방안을 추진하고 국제감식협회(IAI), 아시아법과학네트워크(AFSN) 등 국제 법과학 기관과 교육 및 학술분야에 대한 네트워크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또 동국대화 협의해 3개월 동안의 위탁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경찰수사연수원에 문서 위·변조 감정 분야에 대한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최 경장은 “국과수와 검찰은 감정에 대한 영역이 확고하게 구축돼 있지만, 경찰은 아직 현장이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아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며 “문서 감정이 전문적인 분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필적감정도 도입해 국과수와 대검찰청에 버금가는 분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