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거대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높여 ‘깜깜이 재정’을 없애려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92년 정부가 노조에 회계 관련 조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Trade Union and Labour Relations (Consolidation) Act 1992. TULRCA 1992)을 도입한 영국의 노동개혁이 주목받고 있다.

1984년 6월 파업 중인 영국 광산 노조원들이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과 대치해 있다.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1년 가까이 진행된 광산 노조 파업에 무관용 강경 원칙으로 대응했다. /조선DB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1980년대 ‘영국병’의 원인으로 꼽힌 강성 노조에 원칙적 대응으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10여년 간 여러 차례 노조 관계법을 개정했다. 그 성과를 한 데 모은 법이 1992년 도입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이다.

◇정부 “노조의 재정운영 투명성은 많은 국민 공감하는 중요한 개혁 과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1일 기획재정부의 신년 업무보고에서 ‘적폐 청산’을 언급하며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거대 노조의 후진적 행태가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노조 부패는 공직·기업 부패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척결해야 할 3대 부패 중 하나”라며 엄격한 법 집행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 회계 투명성 강화를 통해 우리 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며 “노조 활동도 투명한 회계 위에서만 더욱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도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고용노동부는 “노조의 재정운영 투명성은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요청하는 중요한 개혁 과제”라며 “정부는 노조의 회계 불투명성에 대한 근본적 해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조 활동도 책임성과 민주성을 바탕으로 더욱 건강하게 발전하고 지속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은 관련법을 발의하며 정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정우택·하태경 의원은 노조의 회계감사를 공인회계사가 맡도록 하고,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는 매년 회계 자료를 행정관청에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英, 노조 간부 급여도 연차보고서에 포함해 정부 제출… 공인회계사가 감사

영국은 노사자치주의에 따라 정부가 노조 재정에 적극적인 접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집권한 1980년대를 전후해 노조가 전국적으로 불법 파업을 일으켰다. 입법조사처는 “국가가 개입해서라도 노조 내부 운영을 민주주의 원칙 보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보 접근과 회계 관련 조사가 가능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노조법에 따르면 노조는 노조 명부를 관리하는 인증관(통상 산업부 장관)에게 연차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연차보고서에는 노조의 재무상태표(대차대조표)와 현금흐름표, 노조 간부에게 제공된 급여와 이익의 세부 내역이 포함되어야 한다. 공인회계사가 작성한 감사보고서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 인증관은 노조의 재정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을 임명해 조사하게 할 수도 있다.

노조는 조합원에게 연차보고서와 관련해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회계 관련 위법행위가 일어났는지 조합원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회계 정보 관련 의무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으면 노조 간부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규정도 있다. 노동계는 “기금과 사업비는 단 1원도 회계상 지정된 항목을 벗어나 집행될 수 없다”(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며 반발하고 있다.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기뻐하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조선DB

◇英 마비시킨 ‘불만의 겨울’ 후 대처 취임… 10년 간 점진적으로 노조 규제 강화

한국노동연구원이 노동부에 제출한 ‘선진국의 노사관계 제도·관행 등 변화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노사 관계에서 법률의 역할이 미미했고 ‘노사자율주의’가 기본이었다.

전기가 된 사건은 1978년과 1979년 영국 내 노조들이 일으킨 총파업이다. 노동당 제임스 캘러헌 내각은 오일쇼크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자, 임금인상률 5% 상한제를 도입했고, 공공부문 근로자들은 총파업을 벌여 국가 작동을 중단시켰다. 트럭 운전사와 철도 노동자, 간호사와 청소부 등 공공부문 근로자들이 임금 인상률 상한제 폐지를 요구하며 대거 파업에 가담했다. 전국 교통망이 마비됐고 썩은 쓰레기가 넘쳐났으며 환자들은 입원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당시 일련의 총파업은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린다.

강성 노조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노동당 내각은 1979년 5월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고, 대처 전 총리가 취임했다. 대처 정부는 이전의 보수당 정권과 달리 노조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대신 특정한 행위만 규제하는 각각의 법률을 입법했고, 일련의 법률들을 모두 살펴보면 노조를 약화시키는 점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1980년 제정된 고용법은 노조의 2차 쟁의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면책특권을 없앴다. 2년 뒤 이 법을 개정하면서 노조가 갖는 면책특권 범위를 더욱 제한했고, 불법 쟁의행위가 발생했을 때 노조 기금을 가압류하고 피해에 대해 노조를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

1984년 제정된 노동조합법은 10년마다 노조 임원 선거를 치를 것을 법제화했다. 또 파업 시 사전에 투표를 실시하게 하는 등 노조 내부 운영방식을 규제했다. 1986년 제정된 임금법은 임금위원회가 오직 성인에 대한 급료만 다룰 수 있도록 권한을 축소했다. 1988년에는 고용법을 다시 개정해 쟁의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회원에 대해 노조가 징계하는 것을 금지했다.

1990년 개정된 고용법은 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고용의 조건으로 하고 조합원 자격을 잃으면 해고되는 클로즈드숍(Closed Shop)을 금지했다. 또 고용주는 비공식적 쟁의행위가 발생했을 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했다.

대처 전 총리에 이어 1990년 11월 취임한 존 메이저 전 총리도 비슷한 정책을 이어나갔다. 대처 전 총리 재임기간 이뤄진 노조 관련 입법을 1992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으로 통합했다.

대처 전 총리는 여론을 지지를 받으며 노동개혁을 성공시켰다. 1983년 9월 채산성이 떨어지는 탄광의 폐쇄를 발표하자 전국광부노조 아서 스카길 위원장은 1984년 3월 “대처로부터 영국을 구해낼” 혁명적 전위대를 이끈다며 총파업을 벌였다. 대처는 원칙에 따라 대응했고, 이듬해 2월에는 조합원의 반 이상이 파업을 중단했다. 노조 집행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파업을 끝냈다.

이 일로 대처 전 총리의 지지도가 크게 상승했고, 노조 조합원의 불법행위에 민사상 책임을 부과하는 등의 강경한 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노조도 파업을 첫 번째가 아닌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하게 됐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노조의 정치적 역할은 끝났고, 정치 파업이 사라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