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화로 지방 소멸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방 소멸 현상을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조선비즈는 전국 곳곳에서 지방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현장과 사람들을 찾았다. 지방에 다시 사람이 몰리고 ‘기회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해법이 필요한지 짚어본다.[편집자주]

바다가 보이는 제주도 마을 숙소에서 눈을 뜬다.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돌담길을 걸어 바닷가 앞에 있는 공유 오피스로 출근한다. 공유 오피스에는 개개인이 업무에 필요한 노트북 등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회의를 위한 미팅룸이 마련돼 있다. 퇴근 후에는 함께 내려온 팀원과 미리 찾아 놓은 흑돼지 맛집을 찾아갈 생각이다. 내일 저녁에는 오랜만에 제주도에 사는 친구 부부를 만나기로 했다.
지난 18일 제주도 구좌읍 세화마을 세화 질그랭이거점센터 공유 오피스에서 만난 광고대행업체 애드레시피의 마케팅 담당자 양홍석(31)씨와 변진석(31)씨의 워케이션 일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한 지난 2년은 기업·직장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업무 방식에 적응한 시기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일부 IT 기업이나 글로벌 기업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재택·원격근무가 거의 모든 기업·직장에 도입됐다. 도심의 사무실에 모여 하루종일 함께 일하는 근무 방식이 아니어도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에 큰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은 기업들은 코로나19가 끝나가는 지금도 인재 유치와 고정비 감축을 위해 새로운 근무 실험에 나서고 있다.

최근 떠오른 트렌드는 ‘워케이션’이다.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인 워케이션은 말그대로 휴가지에서 원격으로 근무하는 업무방식을 뜻한다. 제주나 강원도 같은 휴가지에 원격근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달씩 근무하는 식이다.

◇'원격근무’ 다음은 일·휴가 합친 ‘워케이션’… 근로자도 고용주도 ‘만족’

혁신적인 근무 방식을 선제적으로 도입했던 CJ ENM은 작년 10월에 ‘제주점’이라는 오피스를 만들고 워케이션 실험에 나섰다. 제주도 구좌읍 월정리에 거점오피스를 만들고 매달 10명씩 신청을 받아 한 달 동안 ‘제주점’에서 근무할 수 있게 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는 숙박비와 교통비 명목으로 지원금도 200만원(월 기준)이 나온다.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실현시켜준 것이다.

CJ ENM 관계자는 “제주점은 시범운영을 거쳐 올해 2월 정식으로 오픈했고 이번 달까지 모두 120명의 직원이 제주점에서 워케이션을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강원 양양군 현남면에 위치한 데스커 워케이션 센터의 모습./데스커 제공

워케이션을 도입하는 기업은 더욱 늘고 있다. 박효연 한국관광대 관광경영학과 교수와 황지영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관광학 박사가 국내 기업 임원 및 인사총무담당자 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워케이션의 효과로 ‘직원 복지 향상’(4.43점), ‘직원 삶의 질 개선’(4.32점), ‘직무 만족도 증대’(4.28점) 등이 꼽힌다.

워케이션을 사업화한 곳도 있다. 사무가구 브랜드 데스커는 지난 7월 강원 양양 죽도해변 근처 건물 3곳에 워케이션 무료 체험공간을 조성했다. 워케이션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적당한 업무 공간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걸 보고 체험공간을 만든 것이다. 내부에는 데스커의 사무가구를 배치해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알리는 장으로 삼았다.

데스커 관계자는 “7월부터 11월까지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았는데, 오픈 5주 만에 11월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전했다.

그래픽=손민균

지난 20일 강원 양양의 데스커 워케이션 센터에서 만난 직장인들은 하나같이 만족한다는 반응이었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서 근무하는 최하영(31)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최씨는 “아침마다 양양 바다를 바라보고 요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며 “심리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팀회의 때도 아이디어가 잘 나오고 전반적으로 업무 효율도 올라간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어썸레이 개발본부 생산팀 리더인 강병선(45)씨는 “일이 막혔을 때 탁 트인 바다를 보면 업무가 잘 풀린다.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출이나 서핑하는 장면들이 자극이 돼서 업무에 도움이 된다”며 “팀원들과 평소에 하지 못하던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깊은 생각을 공유하는 계기도 된다”고 말했다.

숙박시설 예약 플랫폼 호텔스닷컴이 지난해 11월 10일부터 16일까지 국내 직장인 1000명과 고용주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근로자의 73%가 ‘워케이션이 유익하다’고 응답했고, 고용주의 86%가 ‘워케이션이 직원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일하러 왔다 돈도 쓰고 친구도 부른다… ‘관계인구’ 증가에 경제적 효과 상당

워케이션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청년 인구 유출로 골머리를 앓던 지방에서 소비 인구가 유입되는 새로운 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워케이션 도입으로 발생할 경제적 효과가 약 4조5000억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워케이션으로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직접 소비하는 금액에 관련 산업 고용·생산유발 효과를 합친 규모다.

전입신고를 하고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큰 효과가 나는 걸까. 전문가들은 ‘관계인구’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관계인구란 지역의 거주 인구를 넘어 관광, 체험 등을 통해 유입되는 인구를 의미한다. 한국보다 먼저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일본은 관광·업무를 통해 지역을 방문한 관계인구가 늘면 정주인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차원에서 ‘관계인구’에 따른 지방 소멸 대응 전략을 짰다. 이런 맥락에서 워케이션 활성화에도 공을 들였다. 일본에는 151개 지자체가 참여하는 워케이션 지자체 협의회가 발족돼 운영되고 있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워케이션 시장 규모는 2020년 699억엔에서 2025년에는 3622억엔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소영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균형발전상생센터장은 “인구 감소 지역 대책은 대부분 지역 차원의 소극적 대응책에 머물고 있다. 지역의 인구 유입 등을 목표로 하는 인구 감소 극복 정책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최근 일본 정부가 도입하고 있는 관계인구 정책을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지자체들이 지방 소멸 대응 차원에서 워케이션에 관심을 가지고 정책 지원을 늘리고 있다. 지방의 빈집을 숙소로 활용하거나 버려진 마을 시설을 워케이션 장소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식이다. 제주도 세화마을에 있는 세화 질그랭이거점센터가 이런 예다.

지난 18일 기자가 직접 방문한 세화 질그랭이거점센터에는 4명의 직장인들이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광고대행사와 스타트업에서 워케이션 대상으로 선발돼 제주를 찾은 이들이었다. 몇몇은 야외 테라스에 마련된 좌석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센터는 제주의 유명 관광지와는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다. 제주도 구좌읍 김녕마을에서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건물을 마을 주민들과 지자체가 합심해 공유 오피스로 바꿨다.

애월이나 서귀포 같은 유명 관광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공유 오피스가 생긴 이후로는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유슬기씨는 “남편도 연차를 내서 함께 이곳에 내려와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제주도 구좌읍 세화마을 세화 질그랭이거점센터에서 만난 유슬기씨가 업무를 보고 있다./윤예원 기자

임시찬 김녕마을회 이장은 “단순히 관광객이 즐기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직장인들이 일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마을에 체류하면서 소비가 이뤄지기 위해 워케이션을 위한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제주 외에도 데스커 워케이션 센터가 있는 강원 양양이나 강원 삼척·태백·평창, 경남 통영 등 여러 지자체가 워케이션 센터를 준비하고 있다. 지자체의 워케이션 사업을 자문하고 기업과 매칭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스트리밍하우스의 신동훈 대표는 “워케이션은 주중과 비수기에 새로운 지역에 관계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성장모델”이라며 “워케이션을 도입하면 지역 숙박업체의 비수기 가동률이 2배 가까이 오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자체 차원의 워케이션 대책 필요… 교통·숙박 개선해야

전문가들은 지자체가 기업의 워케이션 인구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지적한다. 워케이션 사업이 단순히 유행을 넘어 지방 소멸 방지 대책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스스로 기업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컨대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도 숙소와 공유 오피스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면 직장인들의 선택을 받기가 힘들다. 세화에서 워케이션을 하는 유씨는 당초 강원도를 후보지로 생각했지만 교통 문제로 제주로 목적지를 바꿨다고 했다.

유씨는 “일과 휴가가 접목됐다고 해도 일은 일이다. 강원도로 가면 차로 3·4시간이 걸렸고, 숙소도 낡은 편이었다. 가는 길도 고생스럽고, 가서도 다른 지역 숙소만큼 몸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근무 환경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 대표는 “워케이션 사업 확장은 결국 기업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유치하는 것이다. 워케이션과 단순한 휴가(vacation)의 차이는 업무 공간의 유무”라고 설명했다.

고태호 제주연구원 연구위원은 워케이션 선두주자인 제주도 역시 사업 확장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전했다. 고 위원은 “읍면에 공유 오피스 공간으로 쓸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새로운 조례를 추진하고 있다”며 “워케이션을 오는 직장인들은 마을 독채에 묵기를 원할 텐데, 농어촌 민박은 물량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고 위원은 이어 “지자체 차원에서 워케이션 전문 대행 서비스를 키우고 현지인을 관리 인력 등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