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저지른 전주환(31)의 신상이 공개되고 과거 행적이 확인되면서 이번 사건을 둘러싼 수사기관과 사법당국의 실책과 무능이 드러나고 있다. 사법당국을 믿고 스토킹 범죄를 신고했던 피해자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동안 경찰과 검찰, 법원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씨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피해자 A(28)씨를 흉기로 살해한 건 지난 14일 밤이다. 경찰과 법원에 따르면 범행 바로 다음날인 15일 오전 10시 30분에 서울서부지법에서 A씨가 전씨를 고소한 사건에 대한 1심 재판 선고가 예정돼 있었다. 사건 한 달 여 전인 지난 8월 18일 검찰은 전씨에 대해 징역 9년형을 구형한 상태였다.

①보복범죄 막지 못하는 현행 구속요건

전씨와 A씨는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던 중 2019년부터 전씨의 스토킹 행위가 시작됐다. 2019년부터 작년 10월까지 전씨가 A씨에게 만나달라며 연락을 시도한 횟수만 300여 회가 넘었다고 한다. 작년 10월 전씨는 불법 촬영 영상물을 유포하겠다고 협박까지 했고, A씨는 작년 10월 7일 전씨를 불법촬영과 협박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신당역 살인사건 가해자 전주환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광진구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호송되고 있다. /뉴스1

전씨는 A씨가 고소한 이튿 날인 작년 10월 8일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하지만 전씨는 구속은 면했다. 전씨를 체포한 서울 서부경찰서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기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법원이 밝힌 이유는 '(전씨의)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각에선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하지만, 전문가들은 현행법상 법원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봤다. 현재 피의자 등을 구속할 수 있는 사유는 ▲주거부정 ▲증거인멸 우려 ▲도주 우려 등 3가지로 제한돼 있다. 재범 위험성이나 보복범죄 가능성은 고려사항으로만 규정돼 있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피해자에 대한 보복범죄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구속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혁 부경대 법학과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구속 자체가 항상 피해야 하는 '절대 악'이 아니다"라면서 "보복 우려가 있는 경우 구속이야말로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응급수단"이라고 지적했다.

치안 현장을 담당하는 경찰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최근 한국경찰학회보에 실린 '피해자 신변보호 제도 개선에 대한 경찰관의 인식 연구' 논문에 따르면 현직 경찰관 317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83.6%가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를 독자적 구속사유로 입법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답했다.

②1차 고소 이후 이어진 스토킹… 2차 고소에도 구속 시도도 안한 경찰

1차 고소 이후에도 전씨의 스토킹은 계속됐다. A씨는 올해 1월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재차 전씨를 고소했다. 그런데 2차 고소 때는 경찰이 아예 구속영장을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선 사건에서 한 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됐기 때문에 이어지는 사건으로 보고 신청 자체를 안 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경찰의 이 판단이 결정적인 '오판'이라고 본다. 한 차례 영장이 기각됐지만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는 만큼 법원이 다른 판단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1차 고소 이후에도 스토킹 행위가 계속되고 2차 고소까지 들어간 상태였다"며 "이런 상황에서 구속영장을 경찰이 신청했다면 법원이 이번에는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15일 서울지하철 신당역에서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A씨를 체포해 수사 중인 서울중부경찰서 점검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뉴스1

검사 출신인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도 "이미 첫 번째 고소 사건으로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고소 내용으로 피해자에게 협박을 했다면 단순 스토킹 처벌법이 아니라 특가법상 보복 협박으로 바로 입건했어야 한다"며 "같은 피해자에 대한 재범이 이뤄진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히 2차 고소 때 구속영장을 청구했어야 하는데 경찰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③스토커 말 믿은 경찰, 피해자는 혼자 남겨졌다

앞서 1차 고소 때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2차 고소 때는 경찰이 영장청구 자체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전씨가 피해자에게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사법당국이 용인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이 스토킹 처벌법 상 사용할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나 잠정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잠정조치를 통해 유치장에 유치하는 등의 대응이 가능한데도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전씨가 더 이상 A씨에게 연락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은 것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스토킹 혐의에 대한 긴급성, 응급성, 급박함에 대한 경찰의 판단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했고, 승재현 연구위원은 "불법촬영이라는 악질적인 성범죄를 저지르고 피해자를 협박까지 한 범죄자의 말을 경찰이 너무 쉽게 믿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피해자인 A씨가 잠정 조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스토킹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심각한 보복 범죄의 가능성은 치안 전문가인 경찰이 판단해야지 피해자에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오선희 변호사는 "피해자가 잠정조치를 원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건 경찰이 전씨를 구속하지 않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논점을 흐리는 것에 불과하다"며 "경찰 수사 자체에 문제가 큰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은 매번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렇듯 이번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뒤늦게 "유치장 유치 '잠정조치 4호'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관련 제도 개선에도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피해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경찰이 직권으로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검찰과 법원도 제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 지난 8월 전씨에게 징역 9년의 중형이 구형된 데다 피해자인 A씨가 합의를 거부한 상태라 보복범죄의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검찰은 구형 당시 전씨에 대한 법정구속을 요구하지 않았다. 법원 역시 직권으로 법정 구속을 할 권한이 있지만 역시나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