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서울 강서구 한 빌라에서 30대 남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A씨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살인사건이라고 판단한 경찰은 유력 용의자로 A씨의 11년 지기 친구이자 항공사 승무원 김모씨를 지목, 긴급체포했다. A씨와 김씨가 전날 함께 술을 마신 뒤 사건이 벌어진 빌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해당 빌라는 유력 용의자 김씨의 집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김씨가 어떠한 방법으로 A씨를 살해했는지 살인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빌라 내부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폐쇄회로(CC)TV는 무용지물이었고, A씨와 김씨가 다투는 모습을 봤다거나 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없었다. 김씨가 생활하던 빌라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견된 김씨의 지문이나 DNA는 증거가 되기가 어려웠다.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을 해결한 것은 김천회 서울경찰청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이었다. 그는 침대 주변에 묻어 있던 '충격비산혈흔'에 주목했다. 충격비산혈흔이란 핏방울이 외부 충격을 받아 주변으로 튀면서 생기는 형태를 의미한다. 어떤 방식이든 폭행이 있었다는 의미다. 김 수사관은 현장에 있는 핏방울의 모양 등을 분석하고, 핏방울이 튄 방향을 향해 실을 연결했다. 그러자 실은 방바닥의 한 점에서 모였다. 해당 지점에 충격이 있었다는 의미다.
분석 결과는 사건의 '스모킹건'이 됐다. 경찰과 검찰은 A씨가 김씨의 머리를 수차례 방바닥에 내리찍었다고 결론짓고 그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A씨의 살인 혐의는 유죄로 인정돼 징역 18년이 선고됐다.
최근 살인 등 강력사건을 해결할 핵심 수사기법으로 혈흔형태 분석이 강조되고 있다. 현장에 남겨진 핏방울의 모양 등을 분석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3D로 재구성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30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지난 2월 전국 최초로 혈흔형태분석전담팀을 만들었다. 당초 혈흔형태 분석은 관내 과학수사요원들 중 시간이 남는 사람들이 투입되는 방식이었지만, 혈흔형태 분석의 중요성을 고려해 전담팀이 출범한 것이다. 팀은 김 수사관을 포함해 3명으로 구성됐고, 이들은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총 17건의 강력사건 현장에 투입됐다.
혈흔형태분석전문수사관은 강력사건 현장에 남겨진 혈흔의 모양을 분석해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핏방울의 위치·모양·크기·방향은 사건 당사자들의 행동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핏방울 형태를 분석하면 사건 당시 피의자 또는 피해자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또 다른 전문 분석관의 2차 검증을 통해 법정에서 정식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국내 혈흔형태 분석의 시발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경북 군위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최용석 총경이 캐나다에서 관련 기법을 배워 이를 국내에 도입하자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한국혈흔형태분석학회가 2008년에 설립됐고, 이듬해부터는 경찰수사연수원에서 관련 과목이 공식 개설됐다.
해외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관련 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와 비교하면 후발주자지만, 경찰청은 2017년부터 혈흔형태 분석을 토대로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3D로 재구성하는 '발혈 추적시스템' 연구개발(R&D)에 착수하는 등 관련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혈흔을 사진으로 촬영하면 혈흔의 크기와 각도 등을 자동으로 분석하는 '스펙토' 애플리케이션(앱)도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현장에서는 전문인력을 양성할 시스템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혈흔형태 분석을 통해 최종 결론을 내는 일이 사람의 몫이기 때문에 기술개발만큼 전문인력 양성이 중요하지만, 아직 체계화된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혈흔형태 분석과 관련된 정식 교육과정은 경찰수사연수원에서 3주 교육이 사실상 전부다. 3주 교육으로 현장을 정확히 분석하는 능력을 갖출 수는 없다고 한다. 못해도 15건 이상의 현장을 직접 경험해 봐야 비로소 '눈이 떠진다'는 게 전문수사관들의 의견이다.
국제혈흔형태분석전문가협회(IABPA)에 정회원으로 등록된 한국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서영일 박사가 유일하다. 김 수사관은 아직 준회원이며, 올해 10월 중 정회원 승급을 앞두고 있다.
김 수사관은 "3주 교육이 있는데 그게 끝났다고 바로 분석을 자신있게 할 수는 없다"며 "보통 1년 6개월 정도 수사관 스스로 분석결과서를 직접 작성해야 수준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학수사관들의 전문성은 하루 아침에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며 "혈흔형태 분석은 사람이 직접 현장에 가야하기에 수사 발전을 위해서는 분석가를 활성화시키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