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긴급헌혈은 수원에서 주몽이가 출동합니다.”

지난달 27일 한국헌혈견협회가 운영하는 카페에 ‘긴급헌혈’ 공지가 떴다. 빈혈 수치가 갑자기 악화됐지만, 수혈용 혈액이 없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비숑프리제 복돌이를 구하기 위해 헌혈을 모집한 것이다. 다행히 복돌이는 수원에 사는 리트리버 ‘주몽이’의 도움을 받아 고비를 넘겼다. 주몽이의 견주 A씨는 “주몽이의 소중한 피 400ml가 복돌이에게 잘 전달됐다”며 “주몽이가 앞으로도 늘 건강관리 열심히 해서 헌혈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고, 주몽이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긴급헌혈을 하러 간 '주몽'./한국헌혈견협회 제공

국내 반려견 숫자가 지난해 기준 600만 마리에 육박하는 가운데 강아지 헌혈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아픈 강아지들을 돕기 위해서, 헌혈을 위해 사육되는 공혈견 문제를 방지하고, 헌혈에 동참해 대형견에 대한 편견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등 다양한 목적으로 안전하게 자신의 애견을 헌혈에 참여시키고 있다.

3일 한국헌혈견협회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헌혈견은 558마리다. 600만에 달하는 국내 애견수와 대비했을 때 헌혈만으로 수혈용 혈액을 공급하기에는 역부족인 수치다. 하지만 2017년 1호 헌혈견이 나온지 5년 만에 헌혈견 500호를 돌파한 것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헌혈을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헌혈견으로 선정되는 것은 아니다. 헌혈할 수 있는 개의 조건은 ▲몸무게 25kg 이상 ▲2살 이상 8살 이하(성견 기준 18개월 이상이면 가능) ▲심장사상충 예방과 구충 등 정기적인 예방접종을 한 건강한 반려견이다. 보통 한 번 헌혈을 하고 3개월이 지난 뒤 다시 헌혈할 수 있지만, 협회에서는 처음 1년은 한 번만 헌혈할 것을 권장한다. 보통 다리의 혈관에서 300~350ml(약 10ml/kg)를 채혈한다. 때로는 다리 혈관에서 피가 나오지 않아 목의 일부 털을 깎고 경맥을 통해 헌혈하기도 한다.

헌혈견 견주들이 헌혈에 참여하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공혈견(혈액나눔견)의 열악한 처우다. 혈액나눔동물은 영리적인 헌혈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동물이다. 헌혈을 목적으로 키워지다보니 잦은 채혈에 시달려야 한다. 견주의 보살핌 아래 1년 한 차례씩 안전하게 헌혈하는 반려견들이 늘어나면서 강제적으로 피를 뽑히는 공혈견의 처우도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혈견 452호인 검은색 리트리버 ‘기네스’의 견주 박수현(32)씨는 지난 4월 헌혈을 위해 기네스의 목털 일부를 깎고 처음으로 헌혈에 참여했다. 다리혈관을 통해 헌혈하고자 했지만 피가 굳어 정작 아픈 강아지에게 전달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박씨는 “아직 긴급헌혈을 한 경험은 없지만 정기헌혈을 이제 막 시작한 만큼 저희는 꾸준히 헌혈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협회에서는 현재 14개의 협력 동물병원과 연계해서 정기헌혈을 진행하고 있다. 매월 마지막 주 협회 정회원인 강아지 주인들로부터 헌혈 참가 신청을 받는다. 대상자로 선정된 강아지는 견주와 함께 정해진 날에 정해진 병원을 방문해 헌혈하게 된다. 정기헌혈 외에 긴급헌혈도 진행된다. 연계병원에서 비축하고 있던 혈액이 모두 떨어졌거나 긴급 수혈이 필요한 강아지가 생긴 경우다. 협회 외에도 건국대학교 수의대병원, 서울대학교 수의병원 등도 헌혈견 모집 등을 통해 반려견 헌혈문화 활성화에 동참하고 있다.

강부성 한국헌혈견협회 대표는 “반려동물 헌혈문화 캠페인을 확장시켜서 서서히 공혈견의 규모를 줄이는 것도 목표지만,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지 않는 반려인들에게는 헌혈을 할 시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공혈견 환경을 좋게 하는 것과 별개로, 반려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자란 반려견들의 헌혈이 좋은 문화로 정착하도록 하고, 즐거운 문화로 인식하고자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헌혈견협회에 반려인과 함께 등록한 헌헐견 '기네스'. '두환', '짱아', '꼬마'/견주들 제공

헌혈견의 견주들은 헌혈이 적합한지 판단하는 검사 과정을 통해 사실상 종합검진을 받게 되는 셈이라며 장점을 설명했다. ‘기네스’의 견주 박씨는 “기네스가 어렸을 때 빈혈 수치가 있었고 적혈구 수치가 평균보다 좀 낮았어서 걱정이 많았다”며 “헌혈 참여를 하기 위해 받은 검사를 통해 수치가 평균으로 와 있어서 개인적으로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까 헌혈할 만큼 건강해졌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고 말했다.

반려견 헌혈이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점도 헌혈에 참여하는 이유다. 이들은 지금보다 더 활발한 반려견 헌혈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헌혈견 문화 확대가 대형견에 대한 선입견을 없앨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풍산개 견종인 492호 헌혈견 ‘꼬마’를 기르는 견주 최귀정(31)씨는 “꼬마가 직접적으로 아직 정기헌혈을 한 적은 없고, 헌혈견으로 등록만 돼 있다”며 “헌혈견이 꼭 헌혈을 해야지만 공혈동물을 없애는 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헌혈견을 홍보하는 역할로도 충분히 공혈동물 문화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아픈 강아지들에게도 헌혈이라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홍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꼬마’와 함께 산책이나 등산을 할 때 꼭 ‘헌혈견’을 알리는 ‘노란 스카프’를 하고 나서고 있다.

헌혈견인 리트리버 ‘두환’과 도고 아르젠티노 ‘짱아’를 키우는 견주 이다희(44)씨도 “사람들에게 친근한 리트리버 종인 두환이와 달리, 짱아는 맹견류라 바깥에서 더 안 좋은 시선을 보낸다. 특히 소형견을 주로 기르는 한국에서 개 물림 사고가 연일 보도되다 보니, 대형견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을 느끼곤 했다”면서 “짱아가 헌혈에 참여하는 것으로 대형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의 인식이 좋게 변하길 바란다”고 했다.

다만 일각에선 아직 헌혈 참여가 미미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강아지 헌혈에 대한 정보나 인프라 지원 등이 부족하고, 문화 형성이 아직 안착된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강부성 한국헌혈견협회 대표는 “반려견을 많이 키우면서 늘어난 혈액수급으로, 암암리에 키우는 공혈견 규모만 커지고 있다”면서 “헌혈견은 1년에 한 번 헌혈을 하기 때문에 헌혈견 3600마리가 있다면 공혈견 피를 대체할 수 있다. 헌혈 문화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