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 작품을 남긴 저항시인 김지하(81·본명 김영일)가 8일 별세했다. 고인은 최근 1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 이날 오후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전했다.

고 김지하 시인. /뉴스1

고인은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 1966년 졸업했다.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이후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주목받았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將星),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 질타하는 저항시 ‘오적(1970년·사상계)’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고인은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사상계는 폐간됐다. 이른바 ‘오적 필화’ 사건이다.

고인은 1974년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은 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약 10개월 만에 출옥했지만, 출소 후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칼럼을 발표했다가 다시 체포돼 수감됐다.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고인이 1975년 발표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담은 1970년대의 기념비적 저항시로 꼽힌다. 1980년대 가수 김광석 등이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에서 자주 불렸다.

고초를 겪은 고인은 1980년 석방 이후 동서양의 철학과 한국의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했다. 고인은 수감 중 수많은 책을 읽으며 삶과 죽음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 사상을 깨우쳤다고 생전에 고백했다. 고인은 1986년 ‘애린’을 기점으로 생명사상과 한국의 전통 사상 및 철학을 토대로 많은 시를 쏟아냈다.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고인은 생명사상을 강조하면서 목숨을 버리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했다. 고인은 칼럼에서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며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했다. 고인은 이 칼럼으로 민주화운동 진영과 갈라서게 됐다.

고인은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젊은이들 가슴에 아픈 상처를 준 것 같아 할 말이 없다”며 해명과 사과를 했지만 민주화운동 진영 내부에서의 논란은 가시지 않았다.

고인은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옥살이를 한 그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였다. 당시 고인은 “시인 김지하는 어떤 여자를 지지하는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고인은 2016년에 쓴 ‘바보1′에선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최순실이를 몰랐고/ 그 애비/ 최태민이를 몰랐다./ 그렇다./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한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입장을 바꾼 바 있다.

고인은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씨와 결혼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김원보(작가)·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화관 관장)씨 등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고인은 만해문학상,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등을 받았다.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