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전 8시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짧게는 작년 말부터, 길게는 2001년부터 이어진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투쟁 집회 현장이었다. 이날은 장애인 단체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의 삭발식이 있었다. 삭발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회 관계자는 “이동을 해야 공부를 하고, 이동을 해야 일을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집회 한 켠에는 휠체어에 탄 박경석 전장연 대표도 있었다.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투쟁을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박 대표는 지난 13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TV토론까지 벌이며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됐다. 그는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목에 ‘장애인 권리를 보장해주세요’라는 피켓을 걸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장애인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박 대표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1983년 대학 동아리에서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박 대표는 이후 평생을 장애인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를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운동 역시 박 대표가 처음부터 함께 했다. 장애인 교육 사업의 한 획을 그은 노들장애인야학 역시 박 대표가 아니었다면 존재하기 힘들었다. 평생을 장애인 인권을 위해 싸워온 박 대표는 얼마 전부터 새로운 싸움에 나서고 있다. 장애인을 향한 혐오와 차별에 대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새로운 적이다. 지난 15일 오전 경복궁역 집회가 끝난 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전장연 사무실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15일 서울 종로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갖고 장애인 운동 활동 계기와 최근 장애인 이동권 이슈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남강호 기자

-이준석 대표와의 토론이 화제다.

“토론 당일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그냥 나 혼자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전장연이 ‘악마화’되는 것이다. 이 대표는 토론에 단골 손님으로 나오는 분 아니냐. ‘헤비급 대 라이트급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에서는 나가지 말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 대표의 말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면 토론회에서 나온 말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정해질 수 있으니 그 부분이 가장 무서웠다.”

-이 대표와 토론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

“일단 이 대표에게 ‘KO패’는 안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다만 토론회에서 정책적인 부분이 더 설명됐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가 3조~4조원의 예산을 요구한다고 말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계산해보면 우리가 요구하는 예산은 1조3000억원 수준이다. 활동 지원 서비스 예산이 가장 크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을 고려하면 자연증가분 정도다.”

-이 대표는 이동권 이야기만 하지 왜 다른 이슈를 꺼내냐며 비판한다. 탈시설 문제나 활동 지원 서비스 예산을 꺼내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장애인의 지하철 이동권 문제는 20년이 지났고 이제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이 90%가 넘으니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것이 이 대표의 논리다. 하지만 애초에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시작된 건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권리에서 그치지 않고, ‘이동하고 교육받고 일자리를 만들고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취지였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시설에 가둬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나와서 교육도 받고 일자리를 갖고 일도 해야 하는데 당장 지하철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하니 이동권 보장부터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겼으니 됐다며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협소하게 잘라내 버렸다.”

-시민들의 출근길을 불편하게 하는 투쟁 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었다.

“출근길 집회는 기획이라기보다는 우연하게 시작됐다. 작년 12월 3일 세계장애인의 날에 여의도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서울 공덕동에 있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집으로 가려고 했다. 홍 부총리의 집에 가려고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서 우발적으로 출근길 집회가 된 것이다. 이동 수단이 지하철뿐이라 지하철을 탔는데 경찰이 막고 과잉 대응을 하면서 일이 커졌다. 억지로 끌고 밀고 하다보니 지하철이 더 연착되면서 일이 커졌는데 비난은 우리에게만 왔다. 전장연 회원 한 명이 시민에게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더 비판을 받았는데 그 부분도 억울한 게 있다. 당시 그 말은 ‘당신들은 급하면 다른 수단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맥락은 빼고 우리를 ‘악마화’하는 데만 힘을 쏟는다. 토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우리가 집회할 때 시민들이 불편해하고 욕하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조직화된 혐오다. 이런 걸 발전시키는 게 이준석 대표라고 생각한다. 이런 갈등이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데 집권여당의 대표가 될 사람이 오히려 협상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를 향해 테러리스트에게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고, 혐오를 유발하는 말을 이 대표 같은 정치인이 하는 게 문제다.”

박 대표는 ‘전과 27범’이다. 1990년대부터 장애인 운동에 뛰어들면서 수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을 돌아다닌 끝에 얻게 된 훈장 아닌 훈장이다. 박 대표가 처음부터 장애인이었던 건 아니다. 어릴 적에 마도로스를 꿈꿨고 해병대에 입대해 수색대를 나오기도 했다. 스스로도 그 시절 자신은 장애의 ‘장’자도 모르는 ‘마초’ 그 자체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다 1983년 대학 동아리에서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박 대표의 인생도 180도 달라졌다. 처음 5년은 밖에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88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 전산과에 입학하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24살의 나이로 장애를 입었다. 장애인이라고 모두 장애인 권익 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아닌데 계기가 있나?

“장애를 입고 보니 휠체어를 타고 계단 하나, 턱 하나 때문에 몸이 흔들리고 무력했다. 취업도 어려웠다. 하반신이 마비되기 전에는 79학번이었는데, 1991년에 다시 대학에 진학했다. 숭실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장애인들을 가르쳤다. 이때만 해도 짧게 할 생각이었는데, 학생 중 한 명이 리프트를 타다가 4주 중상을 입게 돼 문제 제기를 시작하면서 이동권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2001년 오이도 리프트 추락사고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시가 1988년부터 10년 동안 리프트를 열심히 깔아줬다. 처음엔 계단만 있다가 리프트가 생기니까 좋은 줄만 알았다. 근데 툭툭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고 다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거다. 서울시는 ‘떨어져 죽은 거는 유감인데, 떨어진 건 장애인의 운전 잘못’이라는 논리로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건 역대 서울시장 모두 다 똑같다. ‘리프트 철거, 엘리베이터 설치’가 이동권 문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15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발언하고 있다./남강호 기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우리나라 장애인 인식의 현주소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같이 노력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직장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장애인 인식 개선 사업을 실질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미래 세대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동권 투쟁에 대해 반감들이 많이 있지만, 고민할 기회는 생기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희망적으로 본다.”

-최근에는 ‘장애인 탈시설’에 대한 담론도 이끌고 있다.

“탈시설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문제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27%는 수개월 내로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고 응답한다. 우리가 탈시설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나쁜 시설을 막자는 개념이 아니다. 누구나 6~7명이 한 집에서 사는 것보다 자기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장애인은 아직도 100명이나 300명이 함께 한 시설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비장애인 입장에서 장애인은 ‘견적 안 나오는 사람’ ‘효율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장애인들은 이런 맥락에서 시설로 ‘폐기 처분’ 되는 셈이다. 이제는 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 자기결정권에 따라 시설을 나갈 수 있게 해주자는 게 ‘탈시설’이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달라.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결국 모든 사람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다. 노인을 포함한 모든 약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한 사회에서 ‘폐기 처분’한다면 또 다른 약자들도 마찬가지로 ‘폐기 처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0위권에 든다고 하는데 노인이나 장애인 복지는 꼴찌 수준(실제 한국의 GDP 대비 장애인 복지 예산 비율은 0.6% 수준으로 OECD 평균인 2%에 비해 한참 낮은 편)이다. 돈은 있는데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갈라치지 않는 국가가 되면 좋겠다.”

장애인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고 있다고 말한다. 2001년부터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운동이 없었다면 90%가 넘는 서울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도 않았을 테고, 저상버스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장애인 단체의 투쟁 덕분에 장애인 뿐만 아니라 노인과 유모차를 모는 아이 엄마의 일상도 달라졌다. 박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모든 사람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지금 우리에게 장애가 없다고 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언젠가 나 혹은 내 주변의 누군가가 약자로 몰렸을 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