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올해 경찰은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1차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됐다. 동시에 지난 1월 1일 국가수사본부(국수본)도 출범했다. 경찰 책임 수사의 원년이 된 것이다. 오랜 기간 요구했던 수사권 조정이 이뤄진 만큼 2021년은 경찰에게 중요한 1년이었다. 수사력을 증명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 수사는 9개월 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장동 사건에서는 관련 첩보를 검찰보다 5개월 먼저 입수하고도 수사는 뒤늦게 나섰고 주도권을 검찰에게 빼앗겼다. 늑장수사를 넘어 뭉개기 아니냐는 질타까지 받았다.

권력형 비리 사건뿐 아니라 인천 층간소음 흉기난동 사건, 서울 중구 스토킹 살인 사건 등 치안 일선에서도 부실 대응 논란에 휩싸였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매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국수본 첫 무대 LH 투기 수사… 9개월 동안 국회의원 4명 송치

지난 3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기자회견을 열면서 대부분 국민들이 공분에 휩싸였다. LH 직원들이 3기 신도시 등 자사 사업계획과 관련 있는 지역에 집단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폭로된 것이다. LH 직원뿐 아니라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자도 투기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LH 본사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는 지난 3월 9일 남구준 경찰청 국수본부장에게 합동 특별수사본부(합수본)를 설치하라고 지시했고, 합수본은 일주일 뒤 출범했다. 당초 수사인력은 770명이었으나 금융위원회 등 각 기관에서 수사를 도울 인원까지 파견을 받아 인력이 1560명으로 늘었다.

대규모 합수본이 출범하면서 경찰 안팎에서는 LH 수사는 국수본이 치르는 첫 시험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간 신도시 투기 수사는 검찰이 전담해왔는데, 수사권 조정 이후 처음으로 경찰이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경찰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였다.

경찰은 지난 10월까지 부동산 투기 사범 366명을 적발해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정작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자에 대한 수사는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달 15일 기준 국회의원 33명을 내·수사해 4명을 송치하는 데 그쳤다.

◇ 대장동 늑장수사·뭉개기 논란에 주도권까지 빼앗긴 경찰

경찰은 국수본 출범 이후 첫 권력형 비리 사건인 대장동 수사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검찰보다 관련 첩보를 먼저 입수했지만 정작 수사는 뒤늦게 착수하면서 주도권까지 검찰에 내주게 됐다.

앞서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이성문 화천대유 대표와 대주주 김만배씨의 2019년 금융 거래에 횡령·배임이 의심된다며 관련 정보를 지난 4월 경찰청에 통보했다. 경찰청은 이를 서울경찰청에 넘겼고, 서울경찰청은 이 대표 주소지 관할인 서울 용산경찰서로 내려보냈다. 권력형 비리사건의 주요 단서였지만,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선 경찰서에 사건을 넘겼다.

경기남부경찰청 대장동 의혹 전담수사팀이 지난달 17일 이른바 '성남시의회 30억 로비'의 대상으로 지목된 최윤길 전 경기도 성남시의회 의장과 관련해 경기 성남시 화천대유자산관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후 압수품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용산경찰서는 약 5개월 동안 입건 전 조사(내사)만 진행했다. 관련 의혹은 점차 확산됐고, 정국의 뇌관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용산경찰서는 지난 9월까지 이 대표와 김씨를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 게 전부였다. 강제 수사조차 머뭇거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검찰은 화천대유 관계자를 줄소환하는 한편 핵심 피의자들에 대한 신병 확보에 나섰다. 특히 화천대유, 성남도시개발공사, 성남시청, 천화동인 4호 실소유주로 알려진 남욱 변호사 회사 등에 대한 전방위적 압수수색도 진행했다. 외교부를 통해 미국에 체류 중인 남 변호사 여권을 무효화한 것도 검찰이다.

결국 지난 10월 진행된 국정감사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질타가 쏟아졌다. 늑장수사를 넘어 뭉개기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왔다. 울산경찰청장 출신인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은 "검찰은 소환·압수수색 등 진척이 있는데, 검찰보다 5개월 먼저 단서를 잡은 경찰은 아무것도 없다"며 "결과적으로 (수사를) 뭉갠 것 아니냐"고 했다. 남 국수본부장은 "결과적으로 아쉽긴 하지만 뭉갠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 일선 치안도 구멍… 매번 고개 숙이는 경찰청장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사건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경찰은 치안 분야에서도 부실 대응 논란을 자초했다.

올 11월 인천 남동구 빌라에서 층간소음으로 흉기난동이 벌어졌으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2명은 권총과 테이저건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가해자를 제압하지 않고 현장을 이탈했다. 결국 A씨는 40대 남성 B씨와 그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B씨 아내는 목에 흉기를 찔려 뇌사 상태에 빠졌다. 흉기를 든 A씨를 제압한 것도 경찰이 아닌 B씨였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지난달 25일 인천시 남동구 논현경찰서 앞에서 '인천 층간소음 흉기난동' 사건과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 눈을 감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의 신변보호 대상자가 피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이석준(25)씨는 지난달 10일 신변보호 대상자인 전 여자친구 C(21)씨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불과 9일 뒤인 지난달 19일에는 김병찬(35)씨가 서울 중구 한 오피스텔에서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여자친구 D(32)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D씨는 사건 당시 스마트워치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엉뚱한 위치가 전달됐고, 경찰은 다른 장소에 출동해 범행을 막지 못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지난달 21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경찰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소명인데 위험에 처한 국민을 지켜드리지 못한 인천 논현경찰서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김 청장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 13일 송파구 신변보호 가족 살인사건과 관련해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기본 사명인데, 이런 사건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걱정과 불안을 드린 점에 대해 항상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아직 경찰의 수사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수사 역량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며 "상당히 많은 노하우와 경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만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에 입각한 수사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분명히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건 현장에서의 부실 대응과 관련해서는 각종 지원과 함께 법·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곽 교수는 "일선 경찰관들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려면 시설이나 최신 장비를 확보해줘야 한다"면서 "열심히 하려고 해도 국가인권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 진정이나 소송을 당하게 되면 현장에서 위축될 수 밖에 없다. 형사책임 감면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