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서울시 강남구의 한 이면도로에 들어서자 '노인보호구역 여기부터 속도를 줄이시오'라는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바닥에는 노인보호구역이라는 글씨와 함께 제한속도 시속 30km를 알리는 표시도 보였다. 서울에 164개뿐이라는 노인보호구역(실버존)이었다.
하지만 실버존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위태로운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없는 곳인데다 도로폭이 약 2.5m에 불과해 차량들이 길을 걷는 노인을 스치듯 지나가는 모습이 여러 번 목격됐다. 오토바이와 노인이 충돌할 뻔한 순간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을 지나다니는 누구도 '실버존'의 존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허모(40)씨는 "여기서 일한지 4년 정도 됐는데 카페 바로 앞이 실버존인 것은 오늘 처음 들었다"며 "어린이보호구역이나 여성안심 귀갓길에 대해선 들어봤었는데, 사실 실버존에 대해 오늘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실버존에서 만난 시민 12명 중 9명은 실버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했고, 실버존을 안다고 한 시민 3명 중에서도 2명은 자신이 있는 곳이 실버존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근처 회사에서 일한다는 이모(26)씨는 "매일 점심을 먹기 위해 이 곳을 지나다녔는데 실버존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했다.
실버존은 경로당·양로원·노인복지시설 등 노인 통행량이 많은 곳에서 사고 위험을 막기 위해 지정한 구역을 뜻한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과 마찬가지로 주정차가 금지되고 차량 운행 속도는 시속 30km로 제한된다.
스쿨존처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지만 스쿨존과 달리 관리나 홍보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 내 스쿨존으로 지정된 곳은 1741개소인 반면 실버존은 164개소로 10분의 1 수준이다. 올해 스쿨존이 45개 새로 지정될 동안 실버존은 3개만 생겼다.
실버존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스쿨존처럼 과태료가 일반도로에 비해 2배가 적용된다. 예컨대 신호지시를 어겼을 때 범칙금은 일반도로가 6만원인데 실버존은 12만원이다. 이 때문에 실버존의 존재를 모르고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사고를 내고 낭패를 겪는 운전자들의 사례도 적지 않다.
다만 스쿨존 사고와 달리 실버존 사고는 12대 중대과실에 포함돼 있지 않아 사고가 났다고 해서 무조건 형사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고려해 실버존에 대한 안전장치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실버존이 스쿨존보다 시설이나 환경 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며 "정부나 지자체 등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홍보하거나 노인들을 위해 거리에 보호장치를 두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유럽 일부 국가와 같은 경우에서는 도로에 화단을 설치해 운전자들로 하여금 앞만 보고 운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접목하고 있다"며 "한국도 이와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보호구역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매년 보도자료를 내는 등 실버존 홍보를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으로 대면 홍보가 어려워지는 등의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서 좀 더 홍보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