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말이다.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와 고 문옥주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를 증언한 지 이날로 30년이 됐다. 그러나 일본을 상대로 한 국내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좀처럼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재판부마다 '국가면제'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탓이다. 도대체 국가면제가 뭐길래 위안부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막고 있는 걸까.
국가면제란,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적 관습이다. 모든 국가의 주권은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재판을 통한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쓰이고 있다.
◇"국제 관습도 국내법과 같은 '규범'… 관행 따라야"
지난 4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민성철)는 고 곽예남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6명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배소 1심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은 외국을 상대로 한 민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에 관하여 법률을 제정한 바 없고, 대한민국과 피고(일본) 사이에 민사재판권 인정 여부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바도 없다"면서 "이 사건에서 피고에 대한 국가면제 인정 여부는 오로지 국제관습법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제관습법도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규범"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판단 근거로 국제사법재판소(ICJ) 판례를 들었다. 앞서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독일군의 강제노동과 민간인 살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며 독일을 상대로 한 손배소가 제기됐다. 양국 법원은 독일이 국제법상 강행규범을 위반했으므로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제법은 노예제 금지와 집단살해 금지 등을 강행규범으로 두고 있다.
독일은 이에 반발해 ICJ에 제소했고 ICJ는 독일의 국가면제를 인정했다. 대다수 국가의 법원이 해당 사안에 대해서 국가면제를 인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ICJ는 당시 "정부간 외교적 협상에 의한 피해 구제를 기대할 수 있다"며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피해자 구제의 최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적시하기도 했다.
◇"국가 주도 반인륜범죄는 절대규범 위반… 국가면제 예외 둬야"
하지만 국가 주도의 반인륜적인 범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1차 소송에선 이런 취지의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정곤)는 지난 1월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제기한 1차 소송 첫 판결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인용, 일본이 이들에게 각 1억원씩 지급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절대규범'에 해당하는 국제법상 강행규범을 어긴 국가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일본제국에 의해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했다"며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어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또 "국가면제 관련 절차법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실체법상의 권리나 질서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며 "국가면제 이론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가치가 아니고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라 계속 수정되고 있다"고 했다. 국가면제 이론이 시대상에 따라 변하고 있는 만큼, 예외 규정이 미비하거나 관행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를 미뤄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국가면제는 주권국가를 존중하고 함부로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절대규범(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해 타국의 개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국가가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국가면제 관련 법 전무한 탓"… 국회, 조항 마련 시동
1차 소송 추심결정에서도 재판부의 판단은 엇갈렸다. 일본이 1차 소송 1심에서 패하면서 소송비용을 전부 부담하게 됐지만 두 달 뒤인 3월 29일, 새 재판부(재판장 김양호)는 "외국에 대한 강제집행은 그 국가의 주권과 권위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일본에 소송비용을 추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다시 두 달 여 뒤, 중앙지법 민사51단독 남성우 판사는 일본에 재산목록 제출을 명령하며 정반대 결정을 내렸다. 남 판사는 "국가면제 이론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가치가 아니며 여러 나라들이 국가면제의 범위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강제집행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대일관계 악화, 경제 보복 등은 외교권을 관할하는 행정부의 고유 영역이므로 고려 사항에서 제외해야 한다"고도 했다.
재판부간의 의견이 상충하는 이유는 국가면제는 말 그대로 '관습'이기 때문에 정해진 시행 규칙이 없는 탓이다. 국제법 전문가인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2004년에 UN에서 채택된 국가면제 관련 협약이 있긴 하지만 아직 비준이 안 돼 효력이 없고, 국내법에도 국가면제 관련 법 조항이 전혀 없다"며 "그렇다보니 이 관습이 국제법상 강행규정보다 우선하는지를 두고 판사마다 해석이 갈려 판결도 정반대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분석관은 "혼란을 줄이려면 UN 협약이 얼른 비준되거나 국내법을 손봐야 한다"며 "국가면제 예외 규칙을 정해 법을 제정하거나, 개별 사례들에 대해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말했다.
국회는 관련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4일 인신매매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개정안에는 민사소송 시 외국 정부는 주권면제를 원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개정안은 인신매매 피해자가 우리 국민인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어, 개정안이 통과, 시행된다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배소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