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카메라는) 안경, 볼펜, 액자, 시계, 생수통, 화재경보기 등 위장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누구나 찍힐 수 있다.”

지난달 18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초소형 카메라 판매 금지 해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국민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이런 초소형 카메라는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마땅한 규제도 없이 버젓이 팔리고 있다”면서 “불법촬영은 재범률이 매우 높고 악질적인 범죄다. 초소형 카메라 유통을 규제해달라”고 썼다. 지난 18일 마감된 이 청원은 23만 3758명의 동의를 받았다.

초소형 카메라 등을 이용한 불법 촬영 범죄가 줄지 않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초소형 카메라 유통 규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6일 오후에 찾은 서울의 한 전자 상가에서는 초소형 카메라가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다./김효선 기자

◇불법촬영 횡행하는데… “초소형카메라 수천대 팔았다, 불법 아냐”

경찰에 따르면 불법촬영 범죄는 매년 50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카메라 등을 이용한 불법촬영 혐의로 검거된 건수는 지난 2018년 5613건, 2019년 5442건이었다. 작년엔 5037건의 불법촬영 범죄가 발생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Human Rights Watch)’는 지난달 16일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관련 보고서를 내고 2008년 585건이었던 불법촬영 관련 사건은 2017년 6615건으로 11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전체 성범죄 가운데 불법촬영 사건의 비율은 같은 기간 4% 미만에서 11%로 뛰었다. HRW는 “디지털 성범죄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불행히도 한국은 해당 분야의 선두 자리에 있다”며 유관 기관에 대책 마련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같은 범죄에 이용되고 있는 초소형 카메라나 위장 카메라 등은 여전히 인터넷이나 전자상가 등을 통해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6일 포털사이트에 ‘초소형 카메라’를 검색해보니 무수히 많은 상품이 검색됐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부터 중고거래 사이트까지 여러 플랫폼에서 카메라를 구매할 수 있었다. 안경 모양부터 자동차 키, 이동형저장장치(USB) 모양 등 다양했다.

26일 한 인터넷 쇼핑몰에 초소형 카메라가 팔리고 있다.

서울 내 전자 상가를 가봐도 버젓이 이런 카메라가 판매되는 걸 볼 수 있었다. 26일 찾은 서울의 한 전가상가. 기자가 “초소형 카메라를 사러왔다”고 말하자 한 가게 주인은 “그런 건 인터넷 통해서 살 수 있다. 여기서 팔다가 손님이 걸고 넘어지면 벌금 문다”고 답했다.

그러나 불과 30m쯤 떨어진 다른 가게로 가 초소형 카메라를 살수 있는지 묻자, 업주 A씨는 자동차 키, 볼펜 등 모양을 한 위장 카메라 5대를 꺼내보였다. 위법성 여부를 묻자 A씨는 안심 시키듯 “요즘 많이들 사간다. 이 초소형 카메라들만 몇 천 대 팔았다.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제품이었지만, 구매 시 별다른 절차도 없었다. 옆 가게 업주 B씨도 매장에서 초소형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면서 “야간 촬영 모드도 된다. 밤에도 물체가 잘 나오게 찍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26일 오후에 찾은 서울의 한 전자 상가에서는 초소형 카메라가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다./김효선 기자

◇‘뻥’ 뚫린 유통망… “명부 작성 등 구매 규제 시급”

초소형 카메라 등을 이용한 불법촬영 범죄가 화두가 된 지 오래지만, 관련 규제는 여전히 사각지대가 큰 상황이다. 일명 ‘변형카메라 관리법’이라 불리는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은 지난 19대 국회 때부터 꾸준히 발의됐지만 한 번도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법이 도입되면 변형카메라 판매자와 구매자를 등록할 수 있다. 유통 이력 관리 등 사전 규제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변형카메라’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점과 기술 발전에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인해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공공화장실에서 일어나는 불법 촬영 범죄를 막고자 한국주택토지공사(LH)는 8억5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화장실 출입 전 성별 인증 절차를 거치는 ‘QR 화장실’을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방안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아직 출입관리 시스템의 특허 등록이 완료되지 않은 데다 “QR코드 인증에 어려움을 겪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아니냐”는 반발에도 부딪히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판매규제 같은 최소한의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화학약품이 극단적 선택에 많이 이용된 이후 규제가 된 것처럼 초소형 카메라도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본다”면서 “구매할 때 명부 작성 등을 하게 하는 등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