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6년 4월 22일 오후 3시 33분 조선비즈 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법무부가 집단소송제 도입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2020년 추진했다가 무산된 뒤 6년 만이다. 지난해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계기로 소비자 피해 구제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다. 다만, 재계에서는 소송 남발과 경영 부담 확대를 우려하고 있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22일 전체회의를 열고 집단소송제 도입과 관련 공청회를 개최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국회를 찾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만나 집단소송제 등 법무부의 '7대 민생·안전 법안'의 신속 처리를 요청했다. 이후 3주 만에 공청회가 열리며 입법 논의도 속도를 내고 있다.
◇증권 분야만 허용된 집단소송… 전 분야 확대 추진
현재 국내에서 집단소송제는 2005년 시행된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에 따라 허위 공시, 주가 조작 등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이 법은 2009년 도이치은행 주가연계증권(ELS)에 투자했다가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해 2017년 승소한 판결에 적용됐다.
그간 증권 분야를 제외한 일반 소비자 피해 사건은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에 참여 의사를 밝혀야 하고, 판결 효력도 참여자에게만 미치는 '옵트인(opt-in)' 방식이다.
반면 미국식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전체를 자동으로 원고 집단에 포함시키고, 제외를 원하는 사람만 따로 빠지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이다.
정부와 여당은 옵트아웃 방식을 손해배상 소송 전반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민주당 박균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집단소송법 제정안은 기존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을 폐지하고, 모든 손해배상 청구에 집단소송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 시행 전 발생한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소급 적용 조항도 포함됐다.
이번 재추진의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발생한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꼽힌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시 "전 국민 3400만명이 피해자인데, 일일이 소송하지 않으면 배상을 못 받는 구조가 맞느냐"며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국회에는 관련 법안 10건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8건이 대통령 발언 이후 제출됐다.
◇"쿠팡 겨냥 입법" 논란… 소급 적용 공방
야당은 특정 기업을 겨냥한 입법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공청회에서 "법이 쿠팡을 겨냥하면서 소급효(적용)를 무분별하게 인정하면 외교적 이슈로 비화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했다.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도 "소급효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특정 기업에 '집단소송의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외국에서 ISDS(국제투자분쟁) 소송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최경진 가천대 교수 역시 외국계 투자자가 문제를 제기할 소지가 있다고 했다.
소급효가 적용될 경우, 지난해 발생한 SK텔레콤(017670), KT(030200), 롯데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건도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 소비자 단체와 일부 법조계는 과도한 우려라고 반박한다. 한경수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민사 소송 배상은 실제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미국처럼 천문학적 배상액이 나올 구조는 아니다"고 했다.
경실련·참여연대·민변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집단소송법 제정연대'는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집단소송제가 사실상 없는 유일한 나라"라며 조속한 도입을 촉구했다.
◇재계 "소송 비용 급증, 기업 활동 위축 우려"
재계는 긴장하는 분위기다. 경총은 2020년 정부안 추진 당시 "소송 대응력이 약한 중소·벤처기업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했고, 대한상공회의소도 "미국처럼 소송이 급증하면 기업 경영에 큰 부담이 된다"며 남소 방지 장치 마련을 요구했다.
실제 법안이 통과되면 개인정보 유출뿐 아니라 제조물 결함, 금융 소비자 피해, 대형 플랫폼 분쟁 등 다수 피해자가 발생하는 각종 사건으로 적용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피해자 구제 문턱은 낮아지지만 기업 입장에선 잠재적 소송 리스크가 크게 늘어나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기업들은 소송 대응을 위한 법률 자문 비용은 물론 내부 관리·감독 체계 강화에 따른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 구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소송 위주의 규제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정상적인 경영 활동까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입법예고 사이트에서 박균택 의원안에 대해 지난달 접수된 의견 3959건 가운데 상당수는 반대 의견이었다. 소비자 피해 구제 강화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있지만, 기업 부담과 소급 적용 논란이 커 향후 입법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