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법무부 장관 /뉴스1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에 대한 취소소송에서 승소했다. 영국 법원은 중재판정부의 관할 판단에 중대한 법리 오인이 있었다고 보고 판정을 취소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오늘 오후 7시30분 영국 법원에서 진행된 ISDS 중재판정 취소소송에서 승소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 장관은 "본 판정에서 인정된 정부의 배상 원금 및 이자 등 합계 약 1600억원의 배상 의무는 잠정적으로 소멸돼 다시 판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엘리엇이 한미 FTA를 근거로 제기한 ISDS에서 비롯됐다. 엘리엇은 당시 삼성물산 주주로서 합병에 반대했고,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불리했는데도 주요 주주였던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해 삼성물산 주주에 손해를 끼쳤다는 취지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엘리엇은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찬성 의결을 문제 삼아 한국 정부가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해 왔다. 정 장관은 "엘리엇이 지난 8년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약 1조원의 배상을 요구하며 ISDS를 제기한 데 대응해 진행해온 소송"이라고 했다.

지난 2023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사건 중재판정부는 정부에 원금 약 4850만달러와 이자 등을 포함해 한화 약 1600억원 규모를 배상하라고 명령한 바 있다. 정부가 불복해 제기한 이번 취소소송으로 ISDS 판정의 효력은 더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게 됐고, 사건은 중재절차로 다시 환송됐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규정을 근거로 PCA가 관할권이 없는 사건을 판정했다며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를 구했다.

영국 법원은 한미 FTA상 "국가의 조치"와 "투자와의 관련성" 요건을 관할의 전제 조건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해당 요건을 충분히 심리하지 않은 중재판정부의 판단이 영국 중재법상 실체적 관할을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봤다.

정 장관은 "정부는 원 중재 절차의 서면·구술 공방 때부터 국민연금공단이 국제법상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개진했고, 결국 영국 법원의 취소소송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2024년 8월 정부가 근거로 든 한미 FTA 조항에 대해 영국 중재법상 재판권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며 소송을 각하했다. 반면 2심인 영국 항소법원(Court of Appeal)은 지난해 7월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사건을 다시 1심 법원인 고등법원(High Court)으로 환송했다.

사건을 돌려받은 고등법원은 PCA 중재 판정에 취소 사유가 있는지를 따져본 뒤 이날 한국 정부 승소로 판단했다. 정 장관은 "정부는 각하를 겪었지만 항소심에서 이를 뒤집고 파기환송심까지 철저히 준비해 올해 승소 판결을 거뒀다"고 말했다.

ISDS에서 관할은 중재판정부가 사건을 심리할 자격이 있는지를 가르는 문턱으로, 조약이 정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본안 판단에 나아갈 수 없다.

정 장관은 이번 판결을 "국민 여러분의 노후인 국민연금을 지켜낸 소중한 판결"이라며 "엘리엇의 6분의 1에 불과한 소송 비용을 쓰고도 취소소송 인용률 3%의 바늘구멍을 뚫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향후 환송중재 절차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한편, ISDS 대응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법률 제정도 추진해 국민과 국익을 철저히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엘리엇 측의 추가 불복 여부와 판결 확정 여부는 향후 변수로 남아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외환은행 매각 관련 ISDS 취소소송에서 승소해 당초 배상해야 했던 원금과 이자 등 약 4000억원의 배상책임이 모두 소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