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에 대한 규제를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현행 공정거래법·벤처투자법 체계가 지주회사 CVC의 외부 자금 유치와 해외투자를 과도하게 막고 있어, 첨단산업으로의 자금 공급을 가로막는 '병목'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무법인 화우와 한국경제인협회는 3일 'CVC 제도 개선 방안' 세미나를 열고 CVC 관련 규제의 쟁점을 논의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펀드 외부출자 비율 제한(40%) ▲해외투자 비율 상한(20%)을 각각 50%, 30%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향의 제도 개선 필요성이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가 설립한 CVC는 펀드 약정총액의 40%까지만 외부 자금을 받을 수 있다. 또 CVC 펀드가 집행하는 투자 가운데 해외투자 비중은 20%를 넘길 수 없다. 지주회사 내부에 쌓여 있는 유보금을 벤처투자로 유도하겠다는 입법 취지였지만, 실제 운용 과정에서는 공동펀드 조성 등을 가로막는 규제로 기능하고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법무법인 화우의 김치열 변호사는 "지주 체제에 유보된 자금이 흘러가도록 하자는 취지로 외부 자금 제한 규정을 뒀지만, 지금은 오히려 펀드 조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CVC는 통상 해외 투자자와 50대 50 비율로 공동펀드를 만들고 싶어도, 외부출자 규제 때문에 지주회사가 최소 60%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가 돼 협상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실제로 한 지주회사의 CVC가 중국 유력 기업과 공동펀드를 거의 성사 직전까지 추진했는데, 외부출자 제한 규정을 넘길 수 없어 결국 무산된 사례도 있었다"며 "제도 취지와 달리 글로벌 자본과의 합작을 막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해외투자 비율 상한(20%)에 대해서도 '국내투자 잠식'을 전제로 한 규제 설계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남경모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과장은 "CVC의 투자 총량이 정해져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해외투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국내 투자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해외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외투자를 하고, 국내에서는 내수·수출을 위한 투자 수요가 별도로 존재해 두 영역이 일대일로 맞바뀌는 '상충(trade-off)'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도 일정 수준의 규제 완화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강신천 중소벤처기업부 벤처투자과장은 "외부출자 제한 비율을 펀드별 50%까지 허용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며 "공정거래위원회와 논의가 쉽지는 않지만, 계속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해외투자 비율 상한을 30%로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중기부는 동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CVC 투자 대상 제한 규정도 손질이 필요하다는 의견 역시 나왔다. 공정거래법과 벤처투자법은 CVC가 자신이 속한 계열회사뿐 아니라 공시대상기업집단,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한 회사에 대해서도 투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사실상 대기업집단 계열사로의 자금 공급을 차단하는 장치인데, 첨단산업 특성상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만큼 예외를 둘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김 변호사는 "투자가 절실한 AI·반도체 분야는 개별 프로젝트 단위 투자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른다"며 "이런 첨단산업 영역에는 CVC 자금이 흘러갈 수 있도록 일정 범위 내에서 대기업에 대한 투자도 제한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진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역시 "국가전략산업에 참여하는 주체 중에는 중소·중견기업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기업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대기업이 역할을 할 수 있게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내에 대한 투자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유인책을 확실하게 설계해야 한다"며 "CVC 제도 개선 논의도 단순 규제 완화 차원을 넘어, 투자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제도 설계 논의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