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시각)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이 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피의자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를 미국이 아닌 한국으로 송환하라고 결정했다. 불과 2주 전 미국 송환을 하라고 했다가, 항소법원이 “법 위반이 있었다”며 파기 환송하자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이 결정에는 권씨 측 변호사와 몬테네그로 전직 법무장관의 주장, 한국 법무부의 의견서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최종 결정은 몬테네그로 법무장관 몫으로 남아있지만 권씨의 한국행이 확정된다면 재판 장기화와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정서희

이날 AP통신에 따르면 고등법원은 권 대표를 그의 국적지인 대한민국으로 송환하라고 결정했다. 지난달 20일에 미국으로 송환하라고 했지만, 지난 5일 항소법원이 파기환송하고 다시 내려 보내면서 재심리 했다. 항소법원은 홈페이지에 공개한 결정문에서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의 2월 20일 판결이 미국과 대한민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 순서와 관련해 명확하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며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하고, 이에 따라 본 사건을 재심과 판결을 위해 1심 법원으로 환송하라”고 밝혔다.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은 지난달 권 대표를 미국으로 송환하라고 판결하면서 판결문과 판결 이유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고등법원은 미국 대사관이 권 대표 인도 요청을 작년 3월 27일 했고, 한국은 다음날인 28일 했다고 판단했다. 몬테네그로는 여러나라가 동시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면 범죄인 인도 청구 순서, 범죄인 국적 등을 고려하도록 한다. 이에 먼저 요청한 미국에 보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결한 것.

그런데 미국의 인도 요청은 정확히 말하면 ‘권 대표를 임시 구금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것을 공식 범죄인 인도 요청이라고 본 고등법원 판결에 권 대표 측 변호인이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 법무부도 의견서를 제출했다. 법무부가 권 대표 송환을 요청한 최초 시점은 작년 3월 24일이다. 당시 영어로 이메일을 보냈고, 26일 몬테네그로 언어로 한번 더 보냈다. 몬테네그로 형사사법공조법에 따르면 해외 사법당국의 전자 송부 요청서도 내용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공식 요청으로 간주한다.

몬테네그로 법원의 변심에는 혼란한 현지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권 대표가 공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됐을 당시 법무장관이 작년 10월 정권 교체로 바뀌었다. 새로 취임한 법무장관은 취임 후 “미국이 우리의 중요한 대외 정책 파트너”라며 권 대표를 미국으로 송환할 의사를 꾸준히 내비쳤다. 지난달 고등법원이 권 대표를 미국으로 송환하라고 판결하자 이틀 뒤 전직 법무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가 미국보다 송환 요청을 먼저 했다”고 밝혔다. 소속 당이 다른 전현직 법무장관은 각종 정책을 두고 충돌 중이다.

몬테네그로 고등법원이 권 대표를 한국에 송환하라고 결정해도 현 법무장관의 최종 승인이 필요하다. 몬테네그로 현 법무장관은 권 대표를 한국보다 미국에 보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또 한국이 미국보다 먼저 송환을 요청했다고 밝힌 전직 법무장관과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다만 현 법무장관이 미국 송환을 결정할 경우 권 대표 측이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가져갈 수 있어 1~2년 내에 결론 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권 대표의 한국 송환은 테라·루나 사태를 지켜보는 전세계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선택지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경제 범죄 형량이 낮을 뿐 아니라, 가상화폐는 증권상품으로 인정되지 않아 자본시장법 적용이 가능할지부터 불분명하다. 미국은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겨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해 100년 이상의 징역형이 가능하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현지 검찰은 가상자산에 증권성이 있다는 판단을 선제적으로 내렸다. 반면 한국은 경제사범 최고 형량이 약 40년에 불과하고 가상화폐가 증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법도 전무하다.

무엇보다 한국행이 결정된다면 막대한 자산을 축적한 것으로 추정되는 권 대표가 고액의 법률 자문을 받아 수사·재판을 지연시킬 수 있는 각종 수단을 활용할 여지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변호인 교체, 공판 연기 신청, 법관 기피, 망명 신청, 위헌 법률 심판 제청, 보석 청구 등 다양한 전략을 악용한 재판 장기화가 고질적인 사회적 문제로 꼽히고 있다. 차장검사 출신 법무법인 바른 조재빈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재판을 받으면 구속되더라도 6개월 후에 풀려나지 않나”라며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최대한 오랫동안 끄는 전략을 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