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연이 한국 사법체계의 불신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2년이 넘도록 처리되지 못한 채 쌓여있는 형사 장기 미제사건은 최근 5년새 2배로 늘었고 민사는 2.5배 급증했다. 민사 재판을 기다리는 사이 소송 당사자가 사망하거나 갚아야 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반면 재판 지연을 오히려 이용하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 선출직 공무원들이다. 재판이 늘어지면서 국회의원 임기를 채우고 재선을 준비하는 이들은 국민들에게 법의 존재 이유를 묻게 만든다. 4부에 걸쳐 재판 지연의 현 상황을 짚어보고 원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편집자 주]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성식 법무연수원 연구위원(검사장) 변호인)
"당시 변호인 입회 하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방어권을 행사해 진술했습니다." (검찰 측)
"고소당하고 2년 뒤 느닷없이 조사받다보니 당황했고 답변을 할 때도 우왕좌앙 했습니다." (신 연구위원 측)
이른바 'KBS 검언유착 오보 사건' 당시 KBS에 거짓 정보를 제공해 한동훈 법무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를 받는 신성식 검사장 측이 지난 5월 열린 첫번째 공판준비기일에서 피의자 신문조서(피신조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피신조서는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문건이다. 법정에서 증거로서 자주 등장한다.
신 검사장이 부인한 내용은 '한동훈 장관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말한 부분이다. 검찰에 따르면 신 검사장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근무하던 2020년 6~7월 한 장관과 이동재 전 채널A 기자의 대화 녹취록 내용이라며 두 사람이 유착했다는 내용을 KBS 기자들에게 알렸다. KBS는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가 곧 오보를 인정하고 정정했다.
'한 장관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내용은 신 검사장이 자신의 잘못을 어느정도 인정한다는 것으로 검찰이 수사를 통해 확보한 유리한 증거다. 2021년까지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더라도 강압 등에 의해 거짓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면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됐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작년부터 피신조서는 당사자가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다.
검찰의 '인권 침해 수사'를 막기 위해 피신조서의 증거 능력이 제한되자 재판이 더욱 더 장기화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피고인들이 피신조서에 동의하지 않으면 피고인 신문을 진행해 조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수도권 지방검찰청의 한 평검사는 "(피신조서를 부인하면) 처음부터 사건 당사자들의 진술을 들어야 한다"며 "변호인들이 이의제기할 경우 재판은 더 늦어진다"고 말했다.
피신조서를 포함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장치를 전략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법관 기피 신청을 하거나, 법원 관할 이전을 요청하는 식이다. 세간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은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1~2년 정도 재판을 지연시키면 여론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선출직 공무원의 경우 재판 도중에 위헌 법률 심판 제청, 헌법 소원을 청구해 임기를 채우고 심지어 재선에 나가기도 한다.
◇ "어차피 법정가서 피신조서 부인할 건데…" 조사 거부하는 피고인들
"의뢰인의 입장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는 거죠."
서울 서초동에서 형사사건을 전문으로 내 건 정모(41·사법연수원 43기) 변호사는 재판에 앞서 의뢰인 상황에 맞춰 여러 전략을 고민한다고 했다. 헌법적 가치인 '피고인의 방어권' 범위 내에서다. 작게는 피해자들과 합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불출석하거나 재판 횟수를 늘리고, 크게는 검찰 피신조서 자체를 부인하고 증인신문을 연 뒤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을 받아내는 식이다. 그는 "재판이 늘어지는 것도 있지만, (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일반 형사사건이 아닌 중요 재판에서도 이런 풍경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5월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와 대장동 민간업자 남욱 변호사의 추가 구속영장 심사 당시 검찰은 이들의 영장 발부를 주장하며 "이 사건 피고인은 '어차피 법정에 가서 (피신조서) 내용을 부인할 것인데 뭐하러 조사하냐'며 조사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시행된 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 상황에서도 당사자가 부인하면 피신조서를 증거로 쓸 수 없게 한 형사소송법 개정은 여전히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되고 있다는 평가다.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재판 받고 있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지난 6월 검찰 조사에서 쌍방울 그룹과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하던 입장을 뒤집고 "쌍방울에 경기도지사 방북 추진을 요청했다",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지난 9월 언론에 공개한 자필 진술서에서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과 이 대표와의 연관성을 일부 인정한 진술은 허위라고 뒤집었다. 그는 "저 이화영이 이재명 대표와 관련해 검찰에서 진술한 검찰 신문조서는 임의성(자발성)이 없는 상태에서 진술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썼다.
수도권 한 지방법원의 한 배석판사는 "검찰 진술조서의 증거력이 제한되면서 피고인의 방어권은 보장됐지만, 법관 입장에서는 살펴봐야 할 기록이 대폭 늘어나 재판도 오래 걸리고 심적 부담도 늘었다"고 말했다. 한 부장검사는 "피해자들의 진술도 피고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며 "여러 보완장치를 마련하긴 했지만,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 선출직 공무원은 '위헌제청·헌법소원' 해 임기 채우기도
4년 임기인 한 법정 기업인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는 A씨는 2019년 선거 운동 과정에서 유권자에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아직 1심 선고도 나지 않았다. 2020년 본인이 위반한 혐의를 받는 법에서 사전선거운동의 범위와 행동을 규정하지 않았다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했다가 '위헌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또 비슷한 이유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이 1년 넘게 중단되면서 A씨는 4년 임기를 다 채웠고 올해 초 재선에 성공했다.
A씨는 법에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직(職)을 상실하는 자리에 있다. A씨처럼 형량이 자신의 자리 보전 여부에 영향을 주는 선출직 공무원들은 위헌법률심판 제청, 헌법 소원을 재판 지연 전략의 하나로 적극 활용한다. 한 차장검사는 "아무리 사회적으로 관심이 뜨거운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1년 정도 지나면 많은 이들의 관심이 사라진다"며 "그쯤 되면 담당하던 검사들도 인사 발령이 나는데, 그 사건에 열정을 가진 검사들은 하루, 이틀짜리 직무대리 발령을 요청해서 직접 재판에 들어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이 악용하는 또 다른 재판 지연 전략으로는 재판부 기피 신청이 있다. 재판부가 사건에 관련돼 있거나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지 못하는 등의 사유가 있음에도 재판을 진행할 경우 피고인들은 담당 판사 배제를 요청할 수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에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해 재판이 7개월여 멈췄다. 조국 전 장관도 기피 신청을 통해 5개월여간 '입시비리' 재판이 중단된 바 있다.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의 피고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도 최근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다. 그의 변호인은 "증인신문을 보면 검사가 진술하고, 증인은 동의하는 방식으로 유도신문을 넘어서 검사의 주장에만 부합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다만 일반 형사 사건에서는 아주 간혹 일어난다. 이정도(44기) 변호사는 "정말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형량에 영향이 생길까 우려해 (신청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외에도 법원 관할 이전도 있다.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원이 아닌, 다른 지역의 법원에서 재판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변호인을 바꾸는 전략도 있다. 이런 지연 전략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수도권의 한 부장검사는 "수사때부터 영상녹화를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어느 정도 대처하고 있긴 하다"며 "변호인의 고의가 입증된다면 법원이 하나의 양형 요소로 받아들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