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1984년 대법원은 ‘진해화학 사건’에서 기업활동과 공해피해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책임이 가해자인 기업인에게 있다고 판결해 환경운동의 법적 기반을 제시했다. 1988년엔 ‘전화 교환원 사건’ 판결을 통해 남녀차별 고용 관행을 깨뜨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몇몇 판결은 사회 변화의 물꼬를 트고,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조선비즈는 우리 삶을 바꾸는 데 기여한 판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1992년 1월 17일 새벽 3시, 경찰서에 강도 살인 사건이 접수된다. 피해자는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의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던 53세의 김영오. 그는 속옷 바람으로 양 발목이 공업용 테이프로 꽁꽁 묶여 살해된 채 누워있었다. 그의 몸에는 여러 차례 칼에 찔린 흔적이 보였다. 신고자는 당시 만 19세에 불과하던 김영오의 의붓딸 김보은양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조사에 돌입했다. 일반적인 강도 사건과는 다른 수상한 모습이 보였다. 김영오를 칼로 찌르고 온 방을 뒤져 금품을 훔쳐 간 강도가 대학생 딸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베란다나 창문 등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었으며, 잔인하게 살해된 김영오에게서는 반항한 흔적을 일절 찾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살인범의 정체…성폭행 당한 김보은과 그의 남자친구

현장감식반이 채취한 지문과 족적 등에서 가족이 아닌 사람의 것이 발견됐다. 김보은양과 같은 대학에 다니던 김진관이었다. 사건 이틀 후인 1월 19일, 경찰은 김진관을 체포한 뒤 김보은양과 면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때 김진관을 본 김보은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제가 범인이에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김보은양도 체포됐다.

김보은양과 김진관은 연인 사이였다. 자신과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것을 궁금해한 김진관이 이유를 캐물었고 김보은양은 9살부터 12년 동안 함께 살던 의붓아버지 김영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털어놨다.

이후 두 사람은 김영오를 찾아가 교제를 인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영오는 “자꾸 그러면 둘 다 죽여버리거나 잡아넣어버리겠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김진관은 김보은양에게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고 그동안 김영오가 저지른 모든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보은양은 “아버지는 검찰 간부라서 경찰도 손대지 못한다”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김보은양은 어린 시절 경찰에 김영오를 신고했으나, 집에 찾아와 김영오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경찰관들을 보며 좌절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강도로 위장해 김영오를 살해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김진관은 범행 당일 새벽 1시 30분쯤 김보은양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뒤 김보은양과 함께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김영오의 양팔을 꽉 눌러 꼼짝 못 하게 한 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대법원. /뉴스1

◇정당방위 기준 제시한 대법원…다만 “상당성 결여” 인정 안 해

김보은양과 김진관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두 사람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고 김진관에게 징역 7년을, 김보은양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는 김진관에게 징역 5년을, 김보은양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무려 22명에 달하는 변호사가 김보은양의 무죄를 이끌어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서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김보은양의 정당방위 주장을 기각했다. 현행법상 정당방위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형법 제21조는 ①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고 ②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어하기 위해 한 행위여야 하고 ③ 방위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정당방위의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은 김보은양의 행동이 정당방위 요건에 해당하는 ‘현재의 부당한 침해’에 부합한다고 판단함으로써 정당방위에 대한 전향적인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법조계 내부에서도 형법상 정당방위 요건은 판단 기준 자체가 상당히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김보은양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현재까지도 정당방위 법리에 대한 ‘리딩 케이스’로 꼽힌다.

형법 21조가 명시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는 피해자가 먼저 타인의 신체, 건강, 재산에 해를 입히거나 위협을 가하는 등의 행위를 해야 하고, 이러한 침해가 ‘현재’ 즉, 급박한 상태에 있거나, 바로 발생해야만 성립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앞으로도 침해 행위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피해자가 이러한 지속적인 법익 침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한 행위의 경우에도 침해의 현재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피고인 김보은은 약 12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인 피해자의 강간행위에 의해 정조를 유린당한 후 계속적으로 이 사건 범행 무렵까지 성관계를 강요받았고, 그밖에 피해자로부터 행동의 자유를 간섭받았다”며 “그러한 침해 행위가 그 후에도 반복해 계속될 염려가 있었다면 이 사건 범행 당시 피고인 김보은의 신체나 자유 등에 ‘현재의 부당한 침해 상태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법원은 그렇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식의 방위 행위는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과도하기 때문에 ‘방위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정당 방위 요건을 성립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대법원은 김보은양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건국 이래 살인사건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이 사건은 이회창·김석수 전 국무총리와 최종영 전 대법원장, 배만운 전 사법연수원장이 대법관 시절 심리했다.

이후 김보은양은 1993년 대통령 특별사면 대상자로 올라 복권됐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94년 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다. 이 법에는 가해자 처벌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 상담소, 보호 시설의 설치 및 경비의 보조 등을 규정했고,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에 대한 조항이 들어가 ‘친족 성폭력’이 법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