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대 연구관이 범죄현장 증거물에 빛을 비춰 DNA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2023. 6. 21 / 이명원 기자

2020년 무기징역이 확정된 고유정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 데는 검찰의 과학수사 공이 컸다. 검찰은 DNA 감정 기술로 고유정 차량 속 무릎담요에 묻은 혈흔에서 졸피뎀 성분을 검출했고, 이 혈흔이 피해자의 것임을 확인했다. 검찰이 강압적인 심문을 통해 수사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이렇듯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증거를 확보해 피의자를 가려내고 있다. 조선비즈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검찰의 과학수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편집자 주]

전국민을 공분케 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 검찰과 가해자는 ‘강간 의도’를 두고 첨예하게 맞섰다. 검찰은 강간 의도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가해자는 “바지 단추를 풀거나 손을 집어넣은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혐의 입증을 위해 검찰은 유전자정보(DNA) 감정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가해자의 Y염색체가 피해자 청바지 4군데서 발견됐다. 카디건에서도 1개를 찾아냈다. 검찰은 이 증거를 토대로 1심에서 가해자에게 적용했던 ‘살인미수’ 혐의를 예비적 공소사실로, ‘강간살인미수’ 혐의를 주위적 공소사실로 하는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DNA 감정은 과학수사의 꽃으로 불린다. 영원한 미제로 남을 뻔했던 이춘재 연쇄살인도 DNA 감정 덕에 30여년 만에 해결됐고,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사건에서도 흉기로 쓴 망치 이음쇠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의 DNA가 중요 증거가 됐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디엔에이·화학분석과는 범죄 현장에 남겨진 증거물에서 DNA를 확보해 진실에 다가간다는 측면에서 경찰 과학수사대 ‘KCSI(Korea Crime Scene Investigation)’와 비슷하지만,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KCSI가 경찰의 초동 수사 단계에서 감정물을 수집해 지문을 감식하고 혈흔의 형태를 분석한다면, DNA 샘플을 직접 감정해 감정서를 작성하는 건 대검의 몫이다. 피해자와 피고인이 정반대 주장을 펼치며 대립하거나 여러 진술이 복잡하게 얽힌 까다로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혹은 정황은 있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때 대검 디엔에이·화학분석과가 해결사로 나선다.

◇DNA 샘플, ‘밥솥’ 같은 기계에 넣어 증폭…‘구미 사건’ 친모도 이렇게 검사

지난달 21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대검 별관에 위치한 디엔에이·화학분석과를 찾았다. 이한철 보건연구관의 안내로 DNA 감정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헝겊 세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연구관이 기자에게 특수고글을 건네주고는 헝겊에 파란 조명을 비췄다. “고글을 쓰고 한번 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그러자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액, 타액, 손바닥에서 나온 기름이 고글 너머로 선명히 보였다. ‘진실의 흔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DNA 감정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만약 칼 한 자루에 50개의 DNA 흔적이 남았다면, 이를 일일이 추출한 뒤 샘플로 만든다. 그래야만 각각의 DNA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DNA 샘플이 확보되면 분석에 들어간다. DNA는 극성(極性·생체 내 세포나 조직이 어떤 축을 따라 형태적·생리적으로 서로 다른 성질을 나타내는 것)을 갖고 있어, 박테리아나 세포를 녹일 수 있는 라이신(lysin)으로 샘플 내 세포를 용해한 다음 자석 구슬(magnetic bead)을 이용해 다른 물질로부터 분리해 낸다.

이 연구관이 유리벽 너머의 기계 한대를 소개했다. “이 기계는 밥솥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온도를 높여서 DNA 내 특정 구간만 증폭시켜요. DNA 샘플이 극소량이어도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를 유전자증폭 검사(PCR)라고 한다.

이때 증폭되는 염기서열 반복 구간을 STR(Short Tandem Repeat)이라고 한다. 검찰은 이른바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 때도 아이와 외할머니로 알려졌던 친모의 STR을 서로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강호순 사건에서도 점퍼에 남아있던 극소량의 DNA를 이 같은 방식으로 감정했다.

이한철 연구관이 구강상피세포 추출 도구를 기자의 입안에 넣고 세포를 추출하고 있다. 이 연구관이 “아프진 않다”며 눈을 질끈 감은 기자를 안심 시켰다. 이렇게 긁어 확보한 샘플이 DNA 분석에 쓰인다. /이명원 기자

DNA 샘플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나오면, 모세관전기영동법(Capillary electrophoresis)으로 동일인 여부를 확인한다. 증거물에서 나온 DNA와 특정 용의자의 DNA가 서로 일치하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장비 안에 샘플을 넣으면 DNA가 모세관을 타고 이동한다. 긴 DNA는 무거워서 천천히 이동하는 반면 짧은 DNA는 가볍기 때문에 이동 속도가 빠르다. 이동 속도의 차이로 인해 DNA가 분리되면, 프로그램을 통해 패턴을 분석한 뒤 숫자로 표현한다. 패턴과 숫자는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하곤 모두 제각기 다르다.

“다만, 범행 현장에서 나온 DNA와 용의자의 DNA 숫자가 일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인으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수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할 뿐입니다. 감정서엔 ‘일치 확률이 몇퍼센트(%)다’라고 적는 게 전부입니다.”

DNA 분석에는 보통 4~5일이 소요된다. DNA 샘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아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엄태희 보건연구사는 “수사팀과 일정을 협의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결과를 좀 더 빨리 알려달라는 요청도 종종 들어오지만,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물리적으로 걸리는 시간이 있다보니 최대한 노력해보겠다’는 말뿐이다.

대검에서는 DNA를 활용해 살인과 성폭행 등 강력사건은 물론 엉터리 한약 성분을 밝혀내기도 한다. 남성의 Y염색체를 검사해 성폭행 용의자를 확인하는 ‘동일부계 확인 검사’도 종종 이뤄진다. 동일모계 확인 검사(어머니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되는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는 기법)과 법생물 종식별 검사(사람을 제외한 다양한 생물의 DNA를 분석해 증거를 제공하는 감식기법)도 이용되고 있다.

21일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대 이한철 연구관이 DNA분석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3. 6. 21 /이명원 기자

◇죽은 자는 말이 없다…DNA 감정해 ‘칼 소유자’ 밝혀내

대검 디엔에이·화학분석과는 그간 많은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2019년 1월 인천에서 발생한 ‘친구 살해사건’도 그중 하나다. 인천 중구 운서동 한 호텔 인근에서 A씨가 친구 B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A씨는 “친구에게 세 차례에 걸쳐 2600만원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았고, 차용증 쓰기를 거부해 몸싸움을 벌이다 친구가 먼저 흉기를 꺼내들었으며 그 흉기에 찔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B씨는 이미 사망했기에 말이 없었다. 주변 CCTV도, 목격자도 없었다. 유일한 증거는 A씨의 진술뿐이었다.

쟁점은 ‘칼이 누구의 것이냐’였다. B씨가 칼을 들고 왔다는 A씨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이 사건을 들여다본 이 연구관과 엄 연구사는 칼 한 자루를 40개 구간으로 나눠 살폈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연구관은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피고인과 피해자가 모두 남자였는데 칼에서 여자 DNA가 나왔어요. 이 DNA가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피고인에겐 동거 중인 여자친구가, 피해자에겐 배우자가 있었어요. 검사 결과 칼에서 나온 DNA는 피고인 여자친구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피고인이 칼을 자기 집에서 들고 왔다는 사실이 입증된 거죠.”

A씨는 강력한 증거 앞에서 무너졌다. 이후 A씨가 B씨에게 돈을 빌려준 게 아니라 반대로 돈을 빌렸던 A씨가 독촉 받자 B씨를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드러났다. DNA 증거의 강력한 힘이 진실을 밝혀낸 사례다.

2021년 4월 전북 익산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익산 미륵산 살인사건’에서도 이 연구관과 엄 연구사의 활약이 돋보였다. 남성인 C씨는 여성인 중학교 동창 D씨와 자기 집에서 다투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D씨가 사망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집안에 사람이 죽어있으면 이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고하지 않고 미륵산 7부 능선 자락 헬기 착륙장 인근에 시신을 유기했다는 게 C씨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현장 곳곳에 피해자가 폭행당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현장이 개인 주거지였기에 CCTV나 목격자가 없었고, DNA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엄 연구사는 “현장에서 피처럼 보이는 흔적을 모두 채취해 700여개 DNA 샘플을 감정했는데, 그중 피와 침이 섞인 혈액 샘플 하나가 섞여 있었다”고 말했다. 엄 연구사는 ‘혈청학적 검사법’을 동원해 이 샘플을 분석했다. 혈청 내 항체나 항원을 검출하는 방법이다. 이를 토대로 혈액과 타액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했고, 그 결과 D씨가 C씨의 강제 추행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C씨의 혀를 깨물었으며 C씨가 절단상을 입고 피와 침을 흘렸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21일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엄태희 보건연구사 2023. 6. 21 /이명원 기자

◇“국과수 소속으로 아는 사람 많아”

강력 범죄가 나날이 늘어나면서 대검 과학수사부 디엔에이·화학분석과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5년 간 연평균 700건 이상의 DNA 감정을 진행했다. 해가 갈수록 의뢰 건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한다.

여러 범죄에 투입돼 성과를 내고 있지만, 대검 과학수사부 디엔에이·화학분석과의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이 연구관은 웃지 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기사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일 잘한다’는 댓글이 달릴 수 있어요. 우리를 국과수 소속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대검에서 DNA 감정을 하냐는 사람도 적지 않고요.”

이 연구관과 엄 연구사는 “‘덕분에 사건 잘 해결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짜릿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