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정서희

신한투자증권과 라임자산운용이 싱가포르 무역금융업체와의 수천억원대 국제중재 사건에서 승소했다. 이에 따라 회수금은 라임자산운용이 운영하던 펀드를 이관 받은 웰브릿지자산운용 측으로 돌아가고, 이 펀드에 총수익스와프(TRS·Total Return Swap)를 제공한 신한투자증권에도 일부 지급될 것으로 보인다. TRS란 증권사 프라임브로커리지서비스(PBS)가 펀드 운용사와 맺는 계약이다. 증권사 PBS가 펀드 운용 자금을 빌려주고, 운용사는 이 자금으로 상품을 운용해 수익을 낸 뒤 증권사에 수수료를 지급한다.

20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홍콩고등법원은 지난달 8일 싱가포르 무역금융업체 로디움과 모회사 트리테라스가 신한투자증권·라임자산운용 등을 상대로 신한투자증권과 라임자산운용 측에 4억9776만달러(한화 약 6300억원)를 지급해야 한다는 중재 판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을 기각했다. 작년 6월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의 중재 판정이 홍콩고등법원에서 다시 한번 확인받은 셈이다.

신한투자증권 측은 국내 로펌인 법무법인 화우를, 트리테라스·로디움은 미국의 대형 로펌 밀뱅크(Milbank)를 선임해 대응했다. 신한투자증권 측을 대리한 박지호 변호사와 김명안 외국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무역금융펀드 역외 구조화와 관련된 이슈로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분쟁”이라며 “케이맨제도법과 홍콩법은 물론 국내법까지 철저하게 검토했다”고 설명했다.

◇플루토 펀드, 싱가포르 업체와 재구조화 계약 체결

사건의 발단은 이른바 ‘라임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임자산운용이 설정·운용하고 신한투자증권이 TRS를 제공한 ‘플루토-TF전문투자형사모투자신탁1호(플루토펀드)’는 그해 4월부터 6월까지 트리테라스·로디움이 케이맨제도에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 TAPL인베스트먼트(현 AGPL)와 재구조화 계약을 맺었다.

재구조화 계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플루토펀드의 기초자산인 ‘인터내셔널 인베스트먼트그룹(IIG)’ 운용 펀드 2개를 포함한 5개 펀드의 수익증권을 TAPL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TAPL이 발행한 약속어음(P-note)을 받는 내용이었다. 당시 트리테라스는 IIG 펀드의 수익증권을 양수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플루토펀드 입장에서는 부실 가능성이 있는 자산과 함께 건전한 나머지 자산을 트리테라스에 양도하고, 이를 대가로 약속어음을 받아 안정적인 이자를 수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같은 해 11월, 돌연 ‘대형사고’가 터졌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IIG의 펀드를 폰지 사기로 보고 전문 투자회사 등록을 취소하는 한편 자산을 동결하는 긴급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그러자 신한투자증권은 이듬해 1월 TAPL이 약속어음 담보 계약을 포함한 일부 계약상 의무를 불이행했다며 기한이익상실(EOD·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빌려준 대출금을 만기 전 조기 회수하는 것) 사유 발생을 통보했다.

신한투자증권 입장에서는 TAPL을 믿고 담보를 해제한 뒤 역인수합병(RTO·Reverse Take Over) 방식으로 자금을 회수할지, 아니면 EOD에 따른 분쟁을 선택할 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역인수합병 방식을 택한다면 TAPL 측 요청에 따라 LAM(거래를 위해 플루토 펀드가 케이맨제도에 설립한 SPC)의 담보(LAM이 TAPL에 양도한 각 펀드의 수익증권)를 해제하고, TAPL은 자산을 운용해 약속어음의 원리금을 상환할 의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한투자증권 측은 TAPL 측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수익증권을 현금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각 펀드에 공문을 보내 환매 절차 중단을 요청한 뒤 EOD를 선언했다. TAPL 입장에선 한순간에 6000억원에 달하는 원리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TAPL은 재구조화 계약을 취소하고 손해를 배상하라며 신한투자증권과 라임을 상대로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이에 신한투자증권도 TAPL을 상대로 “EOD 사유가 발생했으니 약속어음의 원리금을 지급하라”며 맞불을 놨다. 그렇게 6000억원대 국제중재가 시작됐다.

법무법인 화우 박지호 변호사(왼쪽), 김명안 외국변호사. /법무법인 화우 제공

◇자산 보전 위한 가처분부터 홍콩고등법원 소송까지 완승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건 ‘자산의 회수 여부’였다. 국제중재에서 승소하더라도 TAPL이 수익증권을 환매하고 자산을 다 써버리면 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국제중재 사건은 대체로 상대 측이 해외 업체이거나 상대 측 자산이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아, 초기 단계부터 효과적인 집행을 위한 준비를 병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화우는 국제중재가 시작되자마자 철저한 대비에 나섰다. 2020년 5월, 합의 또는 분쟁 해결 전까지 펀드의 수익증권과 현금 등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TAPL 소재지인 케이맨제도 법원에 자산 동결을 요청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이듬해 1월에는 국제중재 판정부에도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중재판정부도 TAPL 측이 수익증권을 환매하고 받은 현금을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자산 동결 조치를 취한 화우는 국제중재 본안 사건을 위한 반박 논리를 준비했다. TAPL은 계약 체결 당시 약 5억달러에 달하는 매수금을 지급하는 대신 향후 지급을 확약하는 약속어음과 이와 연계된 담보 계약을 체결했는데, 약속어음의 경우 홍콩법이, 담보계약서의 경우 케이맨제도법이 준거법이었다. 두 변호사는 홍콩법과 케이맨제도법을 샅샅이 뒤져 법리를 구성했다.

TAPL은 위법성과 계약 목적의 상실 등을 근거로 재구조화 계약의 해제나 무효화를 요청했다. 신한투자증권이 수익증권 환매를 저지한 것도 ‘불법 영업 방해’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TAPL은 신한투자증권이 IIG 펀드의 부실을 감추기 위해 고의적으로 허위 진술을 해 계약을 체결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화우는 수천장에 달하는 증거 자료, 양측이 주고 받은 이메일과 통화 내역 등을 모두 조사했다. 1000시간이 넘는 녹취록까지 분석했다. 그러던 중, 신한투자증권 측과 TAPL 측 대리인의 대화 속에서 결정적 단서를 포착했다. 미 SEC가 IIG를 조사한 사실이 언급된 것이다. 즉, TAPL도 IIG에 대한 전반적인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중재판정부는 “신한투자증권은 IIG에 대한 SEC의 조사와 관련해 알고 있던 내용을 모두 성실히 알려줬다”며 “계약 협상 및 체결 당시엔 금융감독원 조사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허위 진술을 했다고도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정에 불복한 TAPL 측은 “중재인단의 판정은 법률 해석과 적용에 오류가 있어 공서양속(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위배돼 무효”라며 홍콩고등법원에 국제중재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화우는 중재인단의 법률 해석과 적용에 오류도 없었고, 그 여부에 대한 판단은 중재 판결 취소 소송에서 세부적으로 재해석할 사안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결국 홍콩고등법원은 화우 측 주장을 받아들여 TAPL의 소송을 기각했다. TAPL이 항소를 포기하며 판결이 확정됐고, 판례는 홍콩 법원에 등재됐다.

김 변호사는 “홍콩, 케이맨제도, 한국, 싱가포르 등 여러 국가의 법령을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역외 펀드 구조화라는 특이하고 전문적인 분야를 다룬 만큼 금융팀과 국제중재팀의 협업이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했다”며 “국제중재 승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금원을 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 자체를 철저히 준비하지 않았다면 무의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증권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 논란이 된 라임펀드의 위법성 이슈와는 별개로, 펀드 내 구조화 거래의 유효성과 적법성을 공식적으로 확인 받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판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