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어느 산속에서 20대 남성이 일면식 없는 중년 여성을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인들과 함께 등산하러 온 피해자는 몸이 좋지 않아 30분만에 등산을 그만두고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차 문을 잠그지 않고 잠이 든 그녀는 전혀 모르던 20대 남성에게 무자비하게 칼에 찔려 사망했다. (중략) 나는 J에게 피해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사건을 저지른 뒤 혹시 미안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을 듣고 피식 웃더니 왜 미안한 생각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그동안 꿈꿔온 것과 달리 살인이 자극적이지 않았고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차승민, '법정으로 간 정신과 의사' 中

5년 간 국립법무병원에서 일하며 230건의 정신감정을 한 정신과 전문의의 회고록이다. 차승민 예사랑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신간 ‘법정으로 간 정신과 의사’를 통해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만난 경험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차 원장은 J씨에게서 정신질환에 해당하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J씨는 ‘정말로 살인과 살인할 때의 쾌감이 궁금해서 사건을 저지른 사이코패스라는 것이 내 결론’이라며 ‘당연히 심신건재로 판단했다’고 썼다. 법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사이코패스, 즉 반사회적 성격장애는 정신질환 진단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이코패스를 정신질환자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질환이 아니라면, 형량 감경 요소도 아닌 걸까. 일면식도 없던 또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정유정(23) 사건으로 사이코패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높아진 가운데, 우리 형법 체계 안에서 사이코패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알아봤다.

사이코패스는 안와전두피질의 기능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진은 안와전두피질을 MRI로 촬영한 것. /위키피디아

◇사이코패스, 법정신의학에서 ‘진단 대상’ 아냐

형법 제10조는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고, 심신장애로 인해 이런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심신장애의 범위를 어떻게 볼지는 재판부에 달렸다. 판례에 따르면, 조현병과 우울증 및 간질 등이 심신장애에 포함된다.

반면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심신장애나 심신미약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 우울성 인격장애나 충동조절장애 등도 마찬가지다. 8세 여아를 강간해 영구 장애를 입히고도 심신미약을 인정 받아 징역 12년을 살고 나온 조두순처럼 음주나 약물 복용 상태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도 이젠 감형 대상이 안 된다.

사이코패스가 심신장애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이유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형사책임능력(법률상의 책임을 분별할 수 있는 정신능력)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형법 제10조도 ‘책임능력이 손상됐을 때’에 국한해 적용 가능한 조항이다.

차 원장은 12일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예를 들어 우리는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너면 생길 수 있는 사회적 혼란 때문에 초록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데, 사이코패스는 ‘내가 빨간불에 건너고 싶다는데 너희들이 왜 막냐’는 마음으로 그냥 건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즉, 잘못된 행위를 참을 수 있음에도 참지 않고 ‘병 때문’이라며 범법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법정신의학의 영역에서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공식적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차 원장은 “진단명이 들어가버리면, 재판을 할 때 ‘이것도 병인가’ 하고 감형 요인으로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때문에 반사회적 성격 장애는 치료의 영역에서만 진단이 가능하고 법의 영역에선 진단 대상이 아니라는 게 차 원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전문의의 정신감정 결과는 법원에서 80~90% 가량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형을 목적으로 ‘반성하는 척’하는 사이코패스도 많지만, 이 역시 전문의의 눈에는 대부분 적발된다. 차 원장은 형제를 연달아 살해하고 피해자의 카드와 차량을 사용하며 그들의 가족 및 지인과 태연하게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은 범죄자의 사례도 소개했다. 그는 깊이 반성하는 척 하며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검찰은 이를 믿지 못했고, 결국 국립법무병원에 정신감정을 받으러 온 상황이었다.

차 원장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가 굉장히 뚱한 표정으로 ‘글쎄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라고 대답했다. 순간 그가 숨기고 있던 본심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며 “거짓 반성은 결국 어떻게든 드러나게 돼있고, 이는 검사나 정신감정을 하는 의사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사이코패스 심신미약 인정, “된다” vs “안 된다”

현재 사이코패스는 심신미약이나 심신장애로 인정받을 수 없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사이코패스를 심신미약자로 볼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안성조 제주대 법학전문대 교수는 지난 2013년 논문 ‘사이코패스 범죄자에 대한 인지과학적 이해’에서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은 선천적인 생물학적 결함으로 인해 도덕적 판단 능력에 장애가 있어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미약한 자들이므로, 이들을 형법상 책임능력 판단에 있어 정상인과 동일하게 취급해선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안 교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이 정상인에 비해 범죄 충동을 억제할 만한 계기가 적기 때문에 형사 처벌을 받을 위험에 많이 노출된 ‘최소수혜자’라고 덧붙였다. 최소수혜자란 미국 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설파한 ‘정의의 원칙’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롤스는 소수의 최소수혜자(운이 나빠 가장 적은 몫을 가져가는 사람)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아직 반대 여론이 우세하다. 사이코패스를 심신장애나 심신미약으로 봐선 안되며, 감형 대상으로 고려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차 원장은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이 과정서 타인을 착취하고 양심의 가책 없이 사회 질서를 흔든다”며 “심신장애로 인정해준다면, ‘나는 장애 때문에 나쁜 짓을 했으니 정당하다고 해 달라’는 식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검찰 간부도 “사이코패스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치료가 가능한 게 아니며,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며 심신 상실 상태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설령 사이코패스가 심신장애로 인정된다 해도 범죄 현장에서 사물 변별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있었다면 심신미약 상태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만약 사물 변별이나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게 인정되더라도, 무조건 감형 대상이 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8년 ‘강서구 PC방 살인’을 계기로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일자, 법무부는 형법 제10조 2항을 개정한 바 있다. 기존 조항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 ‘형을 감경한다’고 규정했으나, 개정안에 따라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