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인 SPC그룹 회장. /뉴스1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배임 혐의 재판이 시작됐다. 파리크라상, 샤니 등이 보유한 계열사 밀다원 주식을 삼립에 헐값에 넘기도록 해 계열사들에 손해를 끼친 혐의다. 허 회장은 앞서 지난 2020년에도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은 바 있는데, 3년여 만에 다시 법적 리스크를 맞닥뜨리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재판장 최경서)는 4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 혐의를 받는 허 회장과 조상호 전 SPC그룹 총괄사장, 황재복 파리크라상 대표 등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공판준비기일은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다. 이날 허 회장 등은 출석하지 않았고, 변호인단만 출석해 쟁점을 정리했다.

허 회장 등은 지난 2012년 말 계열사인 파리크라상과 샤니 등이 보유하고 있던 밀다원 주식을 싼 값에 삼립에 넘기도록 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는다. 당시 파리크라상과 샤니 등이 밀다원 주식을 넘긴 매도가액은 255원이었다. 이는 2008년 주식을 취득한 가격(3038원)이나 검찰이 제시한 2011년 평가액(1180원), 적정가액(1595원)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다.

이 같은 수상한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 파리크라상이 121억6000만원, 샤니가 58억1000만원의 손해를 보고 삼립이 179억7000만원의 이익을 봤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삼립은 허 회장의 아들인 허진수 사장과 허희수 부사장이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다. 장남 허 사장이 지분 16.31%를, 차남 허 부사장이 11.91%를 보유했다. 허 회장은 4.64%를 보유했다.

검찰은 허 회장 등 총수 일가가 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이 같은 행위를 했다고 보고 있다. 2013년 1월 지배주주가 특수관계법인과의 거래를 통해 얻은 이익을 '증여'로 간주하고 세금을 물리는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가 새로 만들어졌다. 허 회장 등 총수 일가는 자신들이 사실상 지배하는 밀다원을 통해 SPC 계열사에 밀가루를 팔아 이른바 '통행세'를 챙기고 있었는데, 증여세법 개정으로 다시 토해낼 상황에 처한 것이다. 밀다원 주식을 파리크라상 아닌 삼립이 100% 보유한다면 밀가루 매출이 일감 몰아주기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삼립을 중심으로 한 통행세 거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검찰은 SPC그룹이 파리크라상, 샤니 등이 보유한 밀다원 주식을 삼립에 매도하지 않으면 매년 8억여 원의 세금이 부과될 상황이었다며, 총수 일가가 밀다원 주식을 저가에 양도해 74억여원을 절감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허 회장 등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고 SPC그룹에 시정 명령과 과징금 647억원을 부과한 상태다. 공정위 고발 사건은 검찰에서 아직 수사 중이다.

검찰은 허 회장을 기소할 당시 "총수 일가에게 부과되는 증여세 회피를 목적으로 주식 양도 필요성을 검토하지 않고 (허) 회장 지시로 급하게 (양도를) 결정하고 가격 흥정 등을 통해 적정가를 산정하지 않고 주식 가치를 평가했다"며 "이사회 결의를 거치는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밀다원 주식을 취득가나 직전 평가액 대비 저가로 삼립에 매도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밀다원) 적정 가치가 쟁점"이라며 "1595원보다 낮은 255원에 주식을 넘긴 게 문제라고 하는데 (검찰에서) 1595원이 적정가라고 산정한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검찰 측은 "대검찰청 회계 전문가가 객관적 방법으로 산정한 것"이라며 "산정 방식을 (공소 사실에) 보완하겠다"고 답했다.

허 회장 측이 밀다원 주식 양도가를 객관적으로 책정했다며 저가 매도 의혹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 만큼, 적정가액이 얼마인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게 재판부의 입장이다.

한편, 허 회장은 지난 2020년 배임 혐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 3년여 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됐다. 당시 허 회장은 2012년 회사와 배우자 이모씨가 절반씩 소유하던 파리크라상 상표권을 이씨에게 넘긴 뒤 회사가 상표권 사용료 213억원을 이씨에게 지급하게 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