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포천 승진과학화훈련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방위산업전 2022 기동화력범에서 육군 K2 전차가 사격하고 있다./뉴스1

지난해 7월 폴란드가 한국의 K2 전차 980대를 발주할 것이라는 낭보가 들렸다. 한국군 주력 지상무기인 K2 전차의 사상 첫 해외 수출이었다. K2 전차 180대 등 총 7조6780억원 규모의 1차 물량에 대한 이행계약이 이미 체결된 상태였다. 국내 기술로 개발된 1500마력 엔진을 탑재한 K2 전차가 해외에 수출되면서 국내 방위산업 업체와 국가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방위사업청 산하 공공기관인 국방과학연구소(연구소)와 K2 전차의 엔진 개발을 담당했던 현대두산인프라코어(최종현대두산인프라) 사이에 치열한 법정 다툼이 진행되고 있었다. 개발비 정산을 두고 극심한 이견이 생긴 것이다. 현대두산인프라는 총 개발비 727억원(정부 투자비+업체 개발비) 중 선금을 제외한 409억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연구소 측은 “계약 당시 ‘확보한 예산 범위 내’에서 정산한다고 명시한 만큼 선금 외에는 줄 수 없다”며 맞섰다.

2년여 간의 1심 소송전은 현대두산인프라의 일부 승소로 끝났다. 대전지법 민사12부(부장판사 이한상)가 지난달 8일 ‘연구소는 현대두산인프라에게 엔진 개발에 투입된 원가비용 약 149억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간 방위산업 계약에서 ‘확보한 예산 범위 내’라는 문구가 자주 사용돼왔던 만큼, 업계에서는 “관행이 깨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두산인프라를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의 변호사들을 만나 비화를 들어봤다.

◇10년간 연구 끝에 탄생한 최초 엔진, 그 이면에는

K2 전차의 개발은 지난 2005년 8월 시작됐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이전에 독일에서만 개발됐던 1500마력 엔진을 국산화하기로 하고, 개발사로 현대두산인프라를 선택했다. 개발 총괄은 현대로템이, 엔진은 현대두산인프라가, 변속기는 다른 중공업사가 각각 맡았다. 1500마력 엔진 개발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면서 현대두산인프라와 연구소는 개산계약(개략적인 금액을 산정해 맺는 계약) 형태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선행사례가 없어 개발에 필요한 원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엔진 개발은 성공했지만, 엔진이 변속기와 결합되지 않았다. 결합을 시도하다 K2 전차의 심장으로 불리는 파워팩(엔진과 변속기 결합체)에 문제가 생기면서 개발 기간이 길어졌다. 이후 독일제 변속기 도입을 결정했고, 파워팩이 제 성능을 냈지만, 이번에는 차체와 호환되지 않았다. 거듭되는 난항으로 계약은 7차례 변경됐고, 당초 예정한 기간(2010년)보다 4년 더 연장되면서 2014년 11월 30일이 돼서야 개발이 마무리됐다.

연구소와 개발사는 통상적으로 방위산업 물품의 개발이 끝난 뒤 정산을 한다. 예를 들어 개발사가 A라는 부품이 10개 들어갔다는 근거 자료를 내면, 연구소 측이 실제로 10개가 사용됐는지, 그 비용은 적절하게 책정했는지 등을 검토하는 식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이 기간만 1년 정도 소요되면서 모든 절차가 2015년 12월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개발도 성공했고 납품도 마무리된 데 이어 확인 작업까지 끝났지만, 분쟁이 시작됐다. 연구소가 선금 외에 남은 개발비를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다. 연구소 측은 ▲이 계약이 상한가를 정한 개산계약이었고, ▲'확보한 예산 범위 내’에서만 정산한다는 조항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정산금 지급을 거부했다. 방산물자 개발 원가를 예상할 수 없어 대금을 사후 정산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관행처럼’ 이뤄졌고, 다수 개발사가 비슷한 이유로 정산금을 받지 못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왼쪽부터 박재우(34기), 시진국(32기), 박종철(35기), 손태원(41기) 변호사. /법무법인 화우 제공

◇'확보한 예산 범위 내’ 문구 무력화에 집중한 법무법인 화우

연구소와 ‘정산원가 설명회’ 등까지 거친 현대두산인프라가 2020년 12월 소송을 내면서 법적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들의 계약서 제20조는 ‘계약금액의 확정은 정산원가에 의하여 피고의 확보 예산 범위 내에서 정산한다’고 규정했다. 연구소가 확보한 예산이 계약의 상한가이고, 이미 선금을 지급했으니 그 이상 줄 수 없다는 게 연구소 측의 주장이다.

재판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확보한 예산 범위 내’라는 계약 문구의 법적 효력이 있는지, 현대두산인프라와 연구소의 계약을 ‘상한가가 있는 개산계약’으로 볼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됐다. 또 연구소 측에서 “정산원가 설명회를 통해 최종 금액을 통보한 2015년 12월 3일부터 5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한 만큼, 소멸시효도 쟁점으로 꼽혔다.

화우는 우선 ‘확보한 예산 범위 내’라는 문구를 무력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 문구가 “수의조건(조건의 성취 여부가 한 당사자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조건)에 해당해 무효”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소송을 이끈 박재우(사법연수원 34기) 화우 변호사는 “예산을 확보하는 데 현대두산인프라가 관여할 수 없었던 상황을 강조했다”며 “방산물자 조달계약 자체가 예산 안에서 정산되는 것이니, 그에 맞는 예산확보 의무를 규정한 조항이라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화우는 재판 과정에서 연구소 측이 K2 1500마력 엔진 개발에 727억원이 투입된 것을 알고 있었고, 내부에서 인정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정산원가 산정결과 승인’과 ‘정산원가 결과 통보’라는 문건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현대두산인프라가 제출한 원가 관련 서류를 연구소가 검토했으며, 원가는 700여억원이었다. 문서제출명령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확보한 A4용지 1100페이지 분량의 문서들을 모두 분석한 결과였다.

소송을 함께한 손태원(41기) 화우 변호사는 “소송을 시작하며 727억원을 입증할 자료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며 “해당 문서는 현대두산인프라코어의 정산자료를 연구소가 검토한 뒤 작성된 문서인 만큼, 700여억원이 사실상 합의된 금액이라는 점을 입증할 자료”라고 했다. 또 화우는 “당시 설명회에는 책임자가 나오지 않았고, 공문이 없었기에 해당일부터 시효를 셀 수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확보 예산 범위 내’ 문구, 상한 아냐”... 관행에 경종

1심은 2년여 만에 현대두산인프라의 손을 들어줬다. 연구소가 확보한 예산의 범위를 계약금의 상한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1심 재판부는 “확보예산 범위를 상한으로 해석하면 연구소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경우엔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며 “원가자료가 없어 개산계약 방식을 통해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의 계약 체결 동기나 경위, 진정한 의사에 부합한다고 보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산계약의 계약금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계약이행 후 산정된 정산원가에 기초해 정해지는 것”이라며 “연구소가 확보한 예산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계약금액의 상한이 정해진다거나 감액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확보 예산 범위 내에서 지급하되, 이를 초과할 경우 차후 해당 부분의 예산을 확보해 지급한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우의 주장을 1심 재판부가 사실상 받아들인 셈이다.

소멸시효 부분에서도 ‘불확정기한부 채권’으로 봐야 한다는 화우의 주장을 인용했다. 화우는 법정에서 ‘정산 합의’를 거쳐야 최종 원가가 확정되고 채무 이행을 할 수 있는데, 연구소가 협의하지 않으면서 채무 이행이 불확정한 상태라고 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이들의 계약은 계약 이행 이후 정산원가를 기초로 계약금을 정하고, 그 이행시기를 ‘협의가 성립한 때’로 정한 것”이라며 “이에 따라 이들 계약의 이행은 ‘불확정기한’에 해당한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2015년 12월 23일 현대두산인프라가 명시적인 거절 의사표시를 한 점 ▲연구소가 2015년 12월 31일 현대두산인프라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의사표시를 한 점 등을 근거로 소멸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소송이 제기됐다고 판단했다. 다만 ‘연장개발비’나 ‘추가개발비’ 부분 관련은 별도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149억여원만 인용했다.

박 변호사는 “합리적으로 투입된 원가 내에서 정산하라는 것이 법의 정신”이라며 “국가 측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체결된 방산물자 개발·조달계약과 관련해 정산 거부나 제한적 정산에 제동을 건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 변호사는 “실제로 개발과 수출에 성공한 상품”이라며 “그런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점이 개선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