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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가 2020년 9월 22일 서해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뒤 박지원 전 국정원장과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관련 자료 수천여 건이 삭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박 전 원장과 서 전 장관 공소장에 따르면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씨 피살 다음날 새벽 1시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시 종전 선언 내용이 담긴 유엔 총회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서 전 실장이 남북 관계를 고려해 진상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박 전 원장과 서 전 장관이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했으며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보안을 이유로 제외됐다.

서 전 실장은 다시 오전 9시쯤 비서관 회의를 열고 “남북 관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보안 유지를 철저히하라”고 했다. 이씨 피살을 공개하자는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비서관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국민들이 알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이게) 덮을 일이냐”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원장도 이후 노은채 전 국정원 비서실장에게 “국정원에서 수집한 첩보와 자료를 즉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노 전 실장은 국정원 차장과 기조실장에게 지시를 전달하며 “첩보 자료를 회수하고 보안을 유지하라”고 했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이 지시에 따라 첩보 및 보고서 50여 건이 삭제되고 국정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보안 교육이 이뤄졌다.

서 전 장관도 합참 작전본부 작전부장에게 전화해 “강도 높은 보안 작전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씨 피살이 외부로 유출되면 안 되니 자료를 수거해서 파기하고 사건을 아는 인원을 상대로 보안 교육을 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에 관련 18개 부대의 이씨 첩보 보고서 5417건,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에 등재된 보고서 75건, 첩보 원음 파일 60여 건 등 5600여 건의 자료가 삭제됐다.

서 전 장관은 이씨 피살이 보도되자 이씨가 자진 월북한 것처럼 보이는 현장 상황을 골라 보고서를 작성하고 허위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으로도 조사됐다. 검찰은 그러나 이씨가 자진 월북한 것이 아니라 실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씨가 어업 지도선에 있던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았으며 당시 바다 수온이 22.1도에서 22.5도로 차가웠고 유속이 시간당 2.92km에서 3.51km로 빠른 상태였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 이희동)는 작년 12월 29일 박 전 원장과 노 전 실장, 서 전 장관을 직권남용과 공용전자기록손상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앞서 서 전 실장은 12월 9일 직권남용과 허위공문서작성·행사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서 전 실장 측 변호인은 “관련 첩보를 여러 부처가 공유해 실무자까지 200~300여 명이 알고 있었는데 은폐를 시도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박 전 원장과 서 전 장관도 혐의를 부인하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