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법정’이 아닌 런던, 파리, 제네바,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는 ‘국제중재’(International Arbitration)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제중재는 양측이 상호 신뢰 하에 소송을 하지 않고 제3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대체적 수단이다. 중재는 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이뤄져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든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신흥 중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변호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총 5회에 걸쳐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허브가 된 비결은 무엇인지, 현지에서 발로 뛰고 있는 변호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우리 국제중재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미래를 조망해본다. [편집자주]

싱가포르 맥스웰 로드에 위치한 맥스웰 챔버스 전경. 국가유산위원회 건물로 지정, 내부는 리모델링했지만 외관은 옛 모습(세관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사진=이미호기자

“변호사인가요(You are attorney lah)?”

‘맥스웰 챔버스(Maxwell Chambers)로 가자’고 하자, 싱가포르 택시기사가 연신 웃음을 띄며 싱글리시(Singlish)로 물었다. 싱글리시는 중국 등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쓰던 언어 습관이 더해져 만들어진, 세상에 둘도 없는 싱가포르식 영어다. 영어와 어순도 다를 뿐더러 중국어 문장 끝에 붙는 어기조사了(le)와 비슷한 lah가 특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점은 택시기사가 기자를 변호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이스(MICE) 산업이 발달한 이 곳에서 출장 온 외국인을 태우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맥스웰 챔버스만 듣고도 변호사로 추측했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맥스웰 챔버스는 최고 수준의 국제중재 심리 시설을 제공하는 세계 최초의 통합 대체분쟁 해결(ADR) 복합단지다. 싱가포르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를 품고 있는 센트럴 지역과 차이나타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고층 빌딩과 달리, 오래된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은 국적을 불문하고 국제중재 관련 변호사나 중재인들이 선호하는 상징적 장소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서울국제중재센터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이곳에서 만난 최고경영자 캐서린 앱(katherine Yap)은 “총 39개 방 가운데 15개가 히어링 룸(심리실)”이라며 “관련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최상의 주문제작형 버추얼(virtual) 및 복합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맥스웰 챔버스에는 복도를 중심으로 양측에 히어링 룸이 들어서 있고, 중간 마다 카페 분위기의 휴게공간(Cozy room)이 마련돼 있었다. 사건 관계인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쉬는 시간’도 고려한 것이다.

SIAC CEO 글로리아 림(사진 왼쪽)과 시니어 카운슬 찬 랭 선이 맥스웰 챔버스 스위츠에 위치한 SIAC 본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니어 카운슬은 국재중재 변호사 중 뛰어난 경력을 인정받는 소수에만 부여하는 명예직이다./사진=이미호기자

◇ ”국제중재 허브, 세계적인 도시가 된다는 뜻”

맥스웰 챔버스는 1940년대에 세관 건물로 쓰였다. 싱가포르 정부가 2010년 리모델링하면서 국제중재 건물로 상징화했다. 이후 법률 시장이 커지면서 2019년에는 정부가 바로 옆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장 건물까지 사들여, 맥스웰 챔버스 스위츠(Suites)로 탈바꿈시켰다.

스위츠에는 국가 대표 중재기관인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뿐 아니라 국제중재법원(ICC)·미국중재협회(AAA)·런던국재중재법원(LCIA) 싱가포르 사무소 등 34개의 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동 편의성과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챔버스와 스위츠 건물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으며, 다리 끝에는 SIAC 사무소가 있다.

싱가포르 국재중재 산업의 발판은 정부 주도로 마련됐다. 2009년 SIAC는 외국인 원장을 발탁하고 이사들도 미국과 스위스, 영국, 인도와 한국 등 외국 변호사들로 기용했다. 홍보대사 역할을 맡은 이사들은 해외를 직접 뛰며 프로모션에 나섰다.

SIAC 상임위원을 지낸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윤병철 변호사는 “이사회 회의 참석을 위한 항공비 지원은 물론 해외 홍보와 관련된 적자 예산도 정부가 감당했다”면서 “중재센터를 알리는 것 자체가 도시 및 국가 홍보와도 연계된다. 중재 허브가 된다는 건 세계적인 도시가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중재인들은 맥스웰 챔버스가 국제중재라는 추상적 개념을 ‘물적 이미지’로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실제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국제중재=맥스웰 챔버스’로 통할 정도다.

맥스웰 챔버스 휴게공간(사진 왼쪽)과 주요 국제중재 기관들이 있는 맥스웰 챔버스 스위츠로 연결되는 구름다리/사진=이미호기자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제중재는 더욱 각광받고 있다. SIAC에 따르면 국제중재 사건 처리 건수는 과거 연간 400~500건 정도였지만, 지금은 연간 1000건 정도로 급증했다. 최근 6개월 동안 가상 및 하이브리드 심리 서비스 이용도 90% 이상 증가했다.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법률시장 종사자들이 분쟁을 소송이 아닌 조정, 중재 등으로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SIAC CEO를 맡고 있는 글로리아 림(Gloria Lim)은 “코로나 사태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소송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지난해 SIAC가 다룬 사건의 94%가 (싱가포르 현지 사건이 아닌) 국제 사건으로 관련 대상 국가만 해도 60개국에 달한다”고 말했다.

◇ ”공정한 진행, 중립적 판정부, 효과적 체계”

전문가들은 싱가포르가 중재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로 ‘중재 절차에 대한 정당성과 신뢰’를 꼽았다. 중재가 공정하게 진행되고, 판정부가 유능하고 중립적이며, 절차를 관장·지원하는 법체계가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맥스웰 챔버스 히어링 룸에서 만난 SIAC 시니어 카운슬 찬 랭 선(Chang Leng Sun)은 “중재지로서 성공하려면 중재를 이용하는 당사자들이 모두 중재 절차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SIAC 설립 이후 지난 30년간 싱가포르의 중재 생태계가 사용자 신뢰를 증진시키는 작용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글로리아 림은 “정부가 분쟁 해결 허브로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집중 투자를 했다”면서 “국제중재에 특화된 법 제도, 다국적 변호사들이 중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열린 문화’, 안정된 사법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면서 소위 중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SICC의 쿠엔틴 로 대법관이 화상회의를 통해 성공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오른쪽에는 시니어 디렉터인 로렌스 웡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미호기자

고등법원의 한 부서인 싱가포르상사법원(SICC)은 설립 7년 만에 국재중재 변호사들 사이에서 중립성과 유연성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ICC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조직으로, SIAC 내부의 절차상 법률적 판단을 하는 SIAC 코트(Court)와는 구별된다.

SICC는 외국인 판사에 의한 재판을 허용한다. 또 등록된 외국인 변호사(현재 총 76명)가 국적과 관계 없이 특정 사건을 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쿠엔틴 로 SICC 대법관(Justice Quentin Loh)은 화상회의(Zoom)를 통해 “SICC 법관들은 국제상사 사건에 대한 정통성을 갖췄다. 다들 법관이 되기 전에는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변호사였다”면서 “이들은 청렴할 뿐만 아니라 중립적이며 상호신뢰가 높은 판결문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분쟁을 겪는 많은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선호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제 상사분쟁 관련 실무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새로운 규칙(SICC Rules 2021)을 제정(오는 4월부터 시행)한 것도 SICC가 얼마나 유연성이 있는 조직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 제기 방법의 단순화△재판부 주도 하에 진행방법 조율 △전문가 증거를 제한적으로 수용 △재판부 직권으로 문서제출명령 가능 등이 새 규칙의 골자다.

SICC의 시니어 디렉터인 로렌스 웡(Laurence Wong)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상거래 실무나 요구사항 등에 적극 대응해 절차를 단순화했고 절차적 유연성을 보장토록 했다”며 “소송 절차 전반에서 재판부 역할을 증대시켰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