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이 자신을 숨겨달라고 부탁할 경우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은닉 이외의 방법으로 범인에 대한 수사나 재판이 불가능하도록 할 경우에만 죄가 성립된다고 본 것이다.
21일 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제3부(노정희 대법관)는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절도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부산구치소에서 수형 생활 중이던 A씨는 2018년 9월 20일 악성고혈압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A씨는 2018년 10월 10일 1개월간 형집행정지 허가 결정을 받았다. A씨는 10월 23일 형집행정지 연장신청을 했지만, 11월 6일 불허 결정이 나왔다.
이에 A씨는 형집행정지 신원보증인이자 전 연인인 B씨를 찾아갔다. A씨는 B씨에게 B씨의 아들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B씨 어머니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A씨는 11월 8일부터 12월 17일까지 B씨의 어머니 집에서 거주하면서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A씨는 B씨에게 자신을 도피하도록 교사한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B씨는 A씨의 지시에 따라 은신처를 제공했다며 범인도피 혐의로 기소됐다. 법정에서는 자신의 도피를 부탁한 것도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4개월, B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B씨에게 새로운 휴대전화와 거처를 마련해주는 등 A씨를 도피하도록 해줄 것을 교사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B씨도 사법기관의 추적을 받는 A씨를 도피시킨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심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은닉 이외의 방법으로 범인에 대한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의 작용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할 경우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봤다. 범인이 도피를 위해 타인에게 도피를 요청하거나,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B씨에게 요청해 새로운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은신처를 제공받은 행위는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보기 어려운 통상적인 도피의 한 유형"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하급심 판단이 맞다고 봤다. 대법은 "원심은 A씨에 대한 공소사실에서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봐 무죄로 판단했다"면서 "원심판결 이유를 관련 법리와 기록에 비춰 살펴보면, 범인도피교사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