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내년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 임원들이 대형로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 달리 근로자가 사망할 경우, 형사적 책임의 주체를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CEO)’로 명시해놨기 때문이다. 특히 시행령상 CEO의 이행 의무와 책임 범위가 모호해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중대재해법 시행 100여 일을 앞두고 건설과 자동차, 플랫폼 등 산업 분야별 고민과 대처법을 들여다봤다.

중대 재해를 막기 위해 사업주의 책임과 처벌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건설업계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모호하고 불명확한 법령으로 대비조차 못하는 곳이 있다. 그레이존(gray zone·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에 속한 배달업계가 대표적이다. 배달 업체와 라이더 간 계약 관계가 복잡하고 지시나 통제 여부도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서울의 한 식당가에서 라이더들이 배달을 나서고 있다./연합뉴스

◇불분명한 계약관계에 혼란스러운 배달업계

배달 플랫폼은 라이더와의 계약 관계가 불명확해 자신들이 처벌 대상이 되는지 여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보호 대상을 도급·용역·위탁 등 계약 형식에 관계없이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했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직접 고용한 근로자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중대재해법은 도급·용역·위탁 계약을 맺은 경우에도 안전·보건 의무를 이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배달 플랫폼의 대표 주자인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 요기요 등은 혼란스러운 상태다. 라이더들은 위탁 계약을 체결해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데, 회사의 지시를 이행해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주무부처가 이들 사이의 계약으로 ‘직영’으로 본다면 플랫폼이 1차적인 책임 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라이더에 대한 플랫폼의 통제가 약할수록 중대산업재해 발생 시 경영책임자가 처벌을 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지만, 산안법보다 확대된 범위로 인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대재해법은 시설이나 장비, 장소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법인이 책임을 지도록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질적인 지배와 운영, 관리는 산안법에 규정된 지배와 관리에서 더욱 확대된 개념이다. 결국 라이더 사고나 제품 결함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자는 배달 플랫폼인지, 식당 주인인지, 라이더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법무법인 율촌 중대재해센터 김익현 변호사는 “배달 플랫폼은 만들어진 음식을 배달만 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로 결함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면서 “건별로 책임 소재나 의무의 내용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어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이 구축해야 할 안전 관리 체계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플랫폼 회사에서는 라이더의 부주의로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도 자신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불만이 나온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현재 상황에서는 배달 업계가 라이더의 안전을 전담하는 조직을 구축하고 사고를 예방하도록 지속적인 관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선 사고 방지를 위해 라이더가 사용하는 휴대폰에 안전 점검을 위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라이더 인식 기술’을 개발해 헬멧이나 각반 등 안전 장비를 착용했는지, 신호를 잘 지키는지, 규정 속도에 맞춰 운행하는지 등을 인공지능(AI)이 파악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즉 사고 방지를 위해 기업들이 고객서비스 비용을 안전 관리에 투자하고 연구개발(R&D)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변호사는 “라이더 안전을 위한 전담 조직도 구성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면서 “기존과 같이 간단한 실내 교육만으로는 중대재해법에 대비하기에 부족하다는 의미”라고 했다.

◇중대시민재해 위험에 노출된 제조업…식음료 업체는 ‘살얼음판’

원료·제조업계는 중대시민재해 위험에도 노출된 상황이다. 시민재해는 제조물로 인한 사고 발생 시 생산과 유통, 판매 업체까지 모두 처벌하는 규정이다. 기존 제조물 책임법에서는 민사적으로 규제했지만, 중대재해법이 생기면서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법무법인 태평양 중대재해본부 소속 오명은 변호사는 “중대시민재해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아직까지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원재료를 생산하는 모든 업체들은 항상 시민재해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제조물 업계 경영책임자(CEO)의 이행 의무를 담은 시행령 자체가 구체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기업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각 기업이 어느 정도의 안전·보건 조직을 둬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할 부분이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전문가들은 대표적으로 ‘중대재해법 9조 1항’을 꼽는다. 해당 조항은 ‘안전·보건 관계 법령은 원료·제조물과 관련해 사람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보건과 관계된 법령을 의미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해당 조문에서 수식어를 빼면 ‘안전·보건 관계 법령은 안전·보건 관계 법령이다’만 남는다.

오 변호사는 “이게 시행령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호하고, 두리뭉실하게 표현된 조항들이 있다”면서 “결국 기업더러 ‘어디까지 해야 안심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을 안고 가라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소비자 대상 B2C 사업을 하는 식음료 업체는 불안감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기존엔 하청업체에서 결함이 생기면 원청까지 형사 책임 확대된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가령 대기업이 제조하는 유명 냉동만두 제품에서 결함이 발생했고 이를 먹은 소비자 1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식중독으로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 발생하면 본사 대표이사가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게다가 제품 자체에 문제가 없었으나 유통 과정 또는 판매 과정에서 식품에 변질이 발생해 사고가 발생한 경우라도 본사 대표이사가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다.

김 변호사는 “중대시민재해를 예방하려면 안전·보건 관리 체계 기능을 모아서 별도의 전담 조직을 개설하고, 경영책임자가 직접 현황을 보고받으면서 의무 이행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자문했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결함이나 유해성을 검증하는 절차와 전문인력을 두고, 원료의 구매나 조달 단계에서도 시험성적서나 품질 관련 각종 확인서, 증빙을 요구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유통과 판매 과정에서는 식품의 변질을 막기 위한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아울러 품질 검증 단계에서도 단순히 불량률 관리 차원이 아니라 유해와 위험성 방지 관점에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유통과 판매를 책임지는 협력업체를 고를 때도 기존보다 더욱 강화된 기준으로 선정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오 변호사는 “이 과정에서 공정거래와 관련한 갑질 이슈가 불거질 수도 있다”며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원청이 책임져야 할 리스크를 떠넘긴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