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의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며 목격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9일 오후 항소심 재판에 출석한 후 광주지방법원을 떠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심 법정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나 건강 문제를 이유로 25분 만에 퇴정했다.

전 전 대통령은 9일 오전 8시 25분쯤 손을 흔들며 부인 이순자씨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출발해 낮 12시 43분쯤 경호 인력의 부축을 받으며 광주지법에 도착했다. 전 전 대통령은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 “광주 시민과 유족에게 사과할 마음이 없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 법정으로 들어갔다.

재판은 광주지법 201호에서 형사1부(재판장 김재근) 심리로 이날 오후 2시 시작됐다. 전 전 대통령은 재판부가 이름을 묻자 청각보조장치(헤드셋)를 착용한 채 “전두환”이라고 답했고, 직업을 묻자 “현재 직업이 없다”고 했다. 생년월일 등은 알아듣지 못해 이씨가 옆에서 불러주는대로 답했다. 그는 꾸벅꾸벅 조는 등 25분쯤 재판에 참석한 뒤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퇴정했다. 이씨는 “식사를 못 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 같다”고 했다.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에게 호흡 곤란 여부를 묻고 법정 밖에서 대기하도록 한 뒤 그를 다시 불러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2시 29분쯤 재판을 끝냈다.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 신청한 현장 검증 조사를 하지 않고 증인만 일부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정웅 당시 31단장에 대한 증인 신청도 기각했다. 현재 99세 고령으로 건강 상태를 알 수 없어 신문을 통해 명령권자를 규명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당시 광주로 출동했던 506 항공대 조종사 중 1심에 불출석한 4명과 회고록 편집·출판에 관여한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에 대한 증인 신청은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40년 전 전일빌딩의 상황을 동일한 조건에서 재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이고 군부대에서 해줄 의무도 없다”며 “실익이 없어 채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사님께 참고로 말씀드리면 재판 지연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증인 신청이 많아지면 일주일에 두 번도 재판할 수 있다”고 했다.

5·18기념재단과 오월 3단체(유족회·부장자회·구속부상자회)는 이날 광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은 성실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재판부도 더는 전두환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경찰은 기동중대, 사복형사, 교통요원 등을 배치해 전 전 대통령이 재판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일부 진입로를 통제했다. 법원 주변에서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그는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았다며 법정 출석을 거부했으나 골프를 치는 모습이 목격돼 논란에 휩싸였고 재판부가 불이익을 경고하자 지난해 11월 말 선고 공판 이후 8개월여 만에 법정에 섰다. 다음 재판은 오는 30일 오후 2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