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역대급 상승 랠리를 펼치자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도 바뀌고 있다. 그동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인 '잠자는 돈'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퇴직연금 자금이 실적배당형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예금의 시대'를 지나 '투자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NH투자증권(005940) 자산관리컨설팅센터는 퇴직연금 투자 방향의 핵심은 '확정기여형(DC)·개인형 퇴직연금(IRP)과 상장지수펀드(ETF)로의 머니무브 가속화'라고 분석했다. 예금처럼 묻어두던 돈이 수익을 추구하는 자금으로 성격을 바꾸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가입자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DC·IRP와 ETF가 있다는 분석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전년(431조7000억원)보다 69조7000억원 늘어난 501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2024년 처음 400조원을 돌파한 뒤 불과 1년 만에 500조원을 넘었다.
DC·IRP 비중은 2024년 50.3%로 처음 DB를 넘어선 데 이어 2025년에는 54.3%로 커졌고, DB 비중은 45.7%로 낮아졌다. 연금을 회사에 맡기는 대신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구조로 바뀌면서 퇴직연금은 더 이상 '보관'하는 금융상품'이 아니라 '운용'해야 할 금융상품이 됐다.
운용 방식의 변화도 가파르다. 실적배당형 적립금은 2024년 말 75조원에서 2025년 말 123조원으로 늘었다. 물론 아직까진 원리금보장형(378조원)이 전체의 75.4%를 차지하며 절대 우위에 있지만, 투자형 상품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퇴직연금 변화의 중심에는 ETF가 있다. 퇴직연금 계좌를 통한 ETF 투자금액은 2025년 말 48조원으로 집계됐다. 연도별 ETF 잔액은 2023년 9조원, 2024년 21조원, 2025년 48조원으로 급증해 3년 연속 100% 이상 증가했다. 실적배당형 적립금 내 ETF 비중 역시 2023년 18.3%, 2024년 27.9%, 2025년 39.6%로 뛰었다.
NH투자증권 자산관리센터는 낮은 보수, 쉬운 매매, 분산투자 효과, 지수 추종의 명확성이 퇴직연금의 장기 운용과 잘 맞기 때문에 ETF 투자금이 빠르게 늘었다고 분석했다. DC형과 IRP 구조상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고를 수 있다는 점도 ETF 투자 확산에 힘을 실었다.
퇴직연금 자금 대부분은 미국 증시를 기본 투자축으로 삼고 있다. 다만 최근 새로 유입되는 자금은 국내 지수형 ETF와 반도체 테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채권혼합50 등에 집중되고 있다.
올해 5월말 기준 상품 유입 순위는 1위 미국 S&P500 추종 ETF(6669억원), 2위 미국 나스닥100 추종 ETF(5316억원), 3위 국내 코스피200 ETF(3725억원) 순이다. 장기 잔고는 미국 중심, 최근 매수는 국내 반도체와 안전자산 30% 비중을 채울 수 있는 채권혼합50으로 일부 이동하는 이중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퇴직연금 사업자 점유율은 은행이 52.0%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증권 26.2%, 생명보험 17.5%, 손해보험 3.4% 등이다. 아직 은행 비중이 가장 크지만, 실적배당형과 ETF 운용 수요가 커질수록 증권사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력이 '누가 더 안전한가'에서 '누가 더 잘 굴리게 도와주는가'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NH투자증권 자산관리센터 관계자는 "퇴직연금 500조 돌파의 본질은 기업이 묻어두던 돈이 개인이 굴리는 돈으로, 예금에서 투자상품과 ETF로 이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며 "퇴직연금 시장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노후자금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구조적 이동에 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