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이 기업의 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가운데 예외 기준을 담은 가이드라인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기업들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자회사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은 의사결정을 멈추고 사업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고, 상장 지연에 따른 비용 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복상장 규제 기대로 지주회사 주가는 크게 상승했지만, 기업공개(IPO)를 통한 자금 조달 길이 막히면서 장기적으로는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한 기업 관계자는 "중복상장을 곧 소액주주 피해와 동일시하는 분위기인 데다, 어떤 경우 예외가 인정되는지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아 자회사 IPO를 준비하던 기업 계획이 올스톱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지난 4월 열린 중복상장 제도개선 공개세미나에서 축사하고 있다./뉴스1

◇ 미뤄지는 중복상장 규제 가이드라인 발표

당초 이달 초 공개될 예정이던 중복상장 규제 가이드라인은 발표 시점을 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금융 당국이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을 상대로 의견을 수렴했지만, 예외 허용 범위를 둘러싼 견해차가 예상보다 컸다.

핵심 쟁점은 예외적 허용의 '기준'이다. 기업마다 지배구조와 자금 수요 상황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일률적인 규제를 적용할 경우, 건전한 기업의 성장 동력마저 꺾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예외를 폭넓게 인정할 경우 '중복상장 원칙 금지'라는 정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업계에서는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모회사 소액주주의 동의를 포괄적으로 확보하고 충분한 보상책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복상장 규제의 출발점은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의 동의 없이 자회사를 별도로 상장해 모회사 가치를 떨어뜨리고, 이런 관행이 한국 증시의 저평가도 유발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덕산하이메탈(077360)은 지난달 임시 주주총회에서 자회사 덕산넵코어스 상장에 대한 일반 주주 다수의 동의(78% 참석 주주 중 92% 찬성)를 얻었다. 중복상장 논란에 막혀 좌초될 뻔한 자회사 상장 계획에 청신호가 켜졌다. 덕산그룹의 사례는 당국이 중복상장 금지 방침을 밝힌 이후 주주로부터 자회사 상장 동의를 얻은 첫 사례가 됐다.

다만 '충분한 동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등 구체적인 방안이 정해지지 않아 자회사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은 당국의 발표를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 상장 준비 기업들 "정해진 것 없다" 불확실성 증폭

문제는 가이드라인 발표가 늦어질수록 기업들이 감당해야 할 불확실성과 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자회사 상장은 기존 투자자들의 자금 회수(엑시트) 뿐 아니라 핵심 사업에 대한 자금 조달과 긴밀히 연결된 만큼 상장 계획이 불투명해지면서 사업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HD현대로보틱스다. HD현대로보틱스의 지분 81.82%를 보유한 HD현대(267250)는 "대규모 투자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로봇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IPO가 필요하다"며 상장을 준비했다.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신사업 진출 과정에서 금융권 대출과 회사채 발행으로 대응하기엔 기업 재무 구조가 지나치게 악화될 위험이 크다.

지난해 열린 스마트공장 전시회에 꾸려진 HD현대로보틱스 부스./뉴스1

하지만 중복상장에 대한 규제로 지난 2월 상장을 위한 실무 작업을 중단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정경희 LS증권 연구원은 "HD현대로보틱스가 다시 IPO를 추진한다면 기존 HD현대 주주들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상장으로 확보한 자금 일부를 지주사 자사주 매입과 소각, 특별 배당에 활용하거나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우선 배정하는 등의 방안이 거론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HD현대 측은 "HD현대로보틱스 IPO와 관련해 확정된 바가 없다"며 "모회사 주주 가치 보호를 최우선으로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것이라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말했다.

◇ IPO 위축에 자금 조달 막힌 기업들

자회사 상장을 철회하고 발 빠르게 '플랜B'로 선회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LS그룹이다. LS그룹은 에식스솔루션즈(LS의 증손회사)의 상장 계획을 전격 철회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LS그룹의 중복상장 사례를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으로 거론하며 직격탄을 날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LS전선 역시 당초 상장을 계획했던 LS에코첨단소재의 잔여 지분을 전량 매입해 100% 완전 자회사로 편입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 부담은 커지고 있다. 자회사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커녕, 당초 상장을 전제로 유치했던 재무적투자자(FI)의 투자금을 모회사가 직접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어서다.

SK㈜ 역시 지분 62.1%를 보유한 SK에코플랜트의 상장 작업을 중단했다. 대신 2022년 프리IPO에 참여했던 FI들의 투자금 반환에 나서고 있다. SK㈜는 지난 4월 FI들이 보유한 보통주 1985억원어치와 전환우선주(CPS) 1999억원 상당을 매입했고, SK에코플랜트도 잔여 CPS 약 6500억원을 자사주 형태로 취득할 예정이다.

증권 업계 관계자는 "중복상장이 금지되면서 IPO 시장 자체가 얼어붙었고,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 창구가 막히면서 기업들이 미래 사업에 투자할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며 "당장 주식시장에는 호재이지만,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들고 사업 경쟁력이 악화되면 기존 주주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했다.